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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마 Oct 16. 2020

리추얼의 힘



원데이 원드로잉을 시작한 지 두 달쯤 되었다




리추얼(ritual)의 의미는 원래 종교적 의례나 의식을 뜻하는 단어였으나, 루틴(routine)과 같이 개인이 반복하는 일상적 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코로나로 인한 요즘의 나의 모닝 리추얼은 다음과 같다. 일어나 코 세척을 하고, 커피 원두 22g을 핸드밀로 갈아 커피를 내려 텀블러에 담아 집 앞 숲 속 산책을 하며 멍 때린다.  한 마디로 일과 관련한 생산적인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런 리추얼을 행하고 나면, 하루를 열심히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영국에서의 생활은 하루 자체가 리추얼이었다. 그만큼 변화가 없었다. 7시에 일어나 씻고,  커피를 들고 학교나 집 근처 대학교 도서관에 간다. 공부를 하고 점심을 먹고, 또 공부를 한다. 리서치 저널도 Rhodia의 A5 landscape 무지나 점이 찍힌 노트만 사용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장을 보고, 저녁을 먹으며 한국 티브이를 본다 (요일마다 보는 프로그램도 정해져 있었다). 식사도 몇 가지 아주 간단한 메뉴 안에서 돌아가며 먹었다. 요가를 하고 씻고, 11시에 침대에 눕는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나 방학 동안 한국에 있는 기간을 빼고는, 영국에서의 이 리추얼은 몇 년 동안 계속되었다. 기념이 될 만한 날에만 다른 일상을 보냈다. 예를 들면, 이번 학기 튜토리얼을 끝낸 날 시나몬 번과 청어 샌드가 맛있는 노르딕 베이커리에서 여유롭게 논문을 읽는 것 같은. 아무튼 뒤돌아 보면 나를 이렇게 쥐어잡지 않으면 박사를 끝내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에 애썼던 것 같다.


미련해 보이고, 강박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이 리추얼의 힘을 믿는다. 베토벤은 매일 아침 커피 원두 60알을 세어 커피를 내렸단다. 하물며 천재인 베토벤도 그날 하루 창작이 잘 되기를 바라면서 60알의 원두로 만든 커피를 매일 만들었는데, 변변찮은 박사생인 내 심정은 어땠을까. 매일 새벽마다 물 떠놓고 동쪽을 향해 108배를 하면 논문이 통과된다고 주워 들었으면 기꺼이 할 수 있을 정도로 절박했다. 배움의 속도도 느리고, 온갖 똑똑한 학생들을 보며 기가 죽어 있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하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그저 하는 것 자체가 매일의 리추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저 하니까 글이 모아지고, 작업이 완성되는 걸 경험해 봤다. 얼마나 학술적 가치가 있는 연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박사논문과 학위가 내 손에 쥐어졌다. 그러나 더 값진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내가 목표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사소한 반복과 사소한 절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이다. 딴짓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 어제를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고, 그래서 어제 못한 공부를 오늘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 쓸데없는 생각으로 누워 뒤척거리지 않도록 자기 전에 요가를 해 몸을 나른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 매일매일 이러한 일상을 반복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좌절할 틈이 중간중간 내 일상에 비집고 들어와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을 것 같다. 


일상에서의 반복되는 행위가 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리추얼이 없는 삶은 안쓰럽다. 두 달 전부터 나는 원데이 원드로잉 리추얼을 시작했다. 또 모르지, 인생은 장기 레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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