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캐나다 진료 이야기, 팔보다 마음이 먼저 풀린 날

웃음 속에 깃든 의사의 위로법

by 김종섭

와장창.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응급실로 실려가 급히 봉합 치료를 받았고, 그 후 3주는 고통과 불편함 속에서 지냈다. 며칠 전 있었던 그 사고로부터 어느덧 시간이 흘러, 오늘에서야 캐나다의 패밀리 닥터에게 실밥을 제거받았다.


실밥을 뽑는 동안, 닥터는 내내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순간 느껴지는 통증보다 그 말이 더 인상 깊었다. 실밥을 뽑는 동안, 닥터는 내내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순간 느껴지는 통증보다 그 말이 더 인상 깊었다. 어딘가 서툴고 반복적인 그 표현 속엔, 환자의 불안을 덜어주려는 배려가 담겨 있었다.


처음에는 병원에서 대충 30 바늘쯤 꿰맸을 거라 생각했지만, 의사는 16 바늘을 꿰맸다고 알려주었다. 실밥을 뽑으면서도 꼼꼼함과 섬세함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상처보다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그의 노력이 느껴졌다.


그는 한국계 2세였다. 영어가 더 편한 듯했지만, 최대한 한국어로 설명하려 애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한국어가 서툴렀는데, 이제는 어색한 표현 속에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다행히 얼굴이 아니고 팔을 다치셨어요. 팔이라… 아내분이 도망갈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닥터는 장난기 섞인 농담을 툭 던졌다. 순간 긴장이 풀리며 웃음이 터졌다. “이제는 팔에 상처가 있으니 누가 함부로 못 건드리겠네요.” "팔도 이젠 움직여도 되니까 팔 아프다고 핑계되고 설거지도 안 하시면 안 됩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한참을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의사의 따뜻한 위로가 배어 있었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가 치료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그 웃음 끝자락에서 불쑥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십 대 시절, 괜히 강한 척하느라 다친 상처도 무용담처럼 포장하던 나. 그 시절엔 상처도 자랑거리였다. 오늘 닥터의 농담 속에서, 그 철없던 소년의 모습이 희미하게 겹쳐졌다. 시간은 흘렀지만, 사람을 웃게 하는 방식은 변하지 않았나 보다.


치료를 마친 뒤, 닥터는 컴퓨터로 내 건강 기록을 살펴보다가 콜레스테롤 수치를 언급했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많이 높습니다. 약을 다시 드셔야겠어요.” 나는 예전에 복용하다가 수치가 좋아져 끊었다고 설명했다. 사실 몇 달 전 피검사를 했을 때 별다른 설명을 듣지 못했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약국에 가서 약을 타며 약사에게 물어보니, 내가 받은 약은 1단계 약이었다. 총 10단계 중 가장 낮은 수치. 즉, ‘매우 높다’는 표현은 진료상의 과장일 수도 있었다. 닥터의 표현은 의학적 기준에 따른 것이겠지만, ‘많이 높습니다’라는 한국어 표현은 듣는 이에게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아마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그가, 수치보다 언어의 뉘앙스를 놓쳤던 것이리라. 다소 엉뚱한 표현이지만, 그의 진심을 알고 있기에 오해는 없었다.


이번 사고로 오른쪽 팔을 전혀 쓸 수 없었던 3주간, 왼팔이 전담해야 할 일이 참 많았다. 식사, 세수, 머리 감기, 심지어 글쓰기까지.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해 오던 일상이 이렇게까지 불편해질 줄은 몰랐다. 실밥을 제거하고 나서도 팔은 여전히 구부러지지 않았다. 의사는 매일 스트레칭과 운동을 하라고 했지만, 몸은 생각만큼 따라주지 않았다.


60년 넘게 써온 팔이었다. 그런데 고작 3주 쉬었다고 이렇게 굳어버릴 줄은 몰랐다. 기계도 오래 쓰지 않으면 녹슬듯, 우리 몸도 사용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기능을 잃는다. 아니, 더 빠르다. 움직이지 않으면 잊혀지고, 사용하지 않으면 멈춘다. 이번 경험은 몸이 아니라 삶 전체에 관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팔을 구부리려 할 때마다, 뇌가 본능적으로 저지하는 느낌이 든다. 혹시나 상처가 다시 벌어질까 하는 두려움 때문일까. 몸이 회복을 망설일 때는, 마음이 먼저 그 회복을 믿어줘야 한다는 걸 배운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다시 해보겠다는 용기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팔의 움직임은 아직 자유롭지 않지만,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단순한 기능의 회복이 아닌, 일상으로 돌아가는 문이 열리는 중이다. 작고 사소한 동작이 다시 가능해지는 것, 그 자체가 자유임을 느낀다. 그 자유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오늘 이 캐나다의 작은 진료실에서 다시 배운다.


팔은 멈췄지만, 마음은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회복의 시작이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