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동물이 공존하는 거리, 그 이면에 담긴 문화와 시선
튀르키예를 여행하면서 가장 먼저 시선을 끈 건 화려한 모스크도, 붐비는 시장도 아니었다. 길거리 곳곳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살아가는 고양이와 개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품게 된 궁금증이었다. 사람들의 발치에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고양이들은 이미 도시의 주인처럼 보였고, 크고 얌전한 개들은 그늘진 공원이나 광장에서 사람들 곁을 조용히 지키고 있었다. 심지어는 차량이 오가는 번화한 거리 한복판에 드러누워 낮잠을 즐기는 개들도 있어, 처음에는 그 광경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개의 경우, 귀에 태그가 달려 있는 것이 특히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이렇게 개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목줄을 매고 산책시키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보이지 못했다. 반려동물 문화가 정착된 한국, 그리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캐나다의 시선으로는 다소 낯설고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태그가 귀에 붙어 있는 개들을 보고, 처음엔 단순한 장식인가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표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척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동물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한 배려가 아닐까 생각했다. 혹은, 거리에서 방목하듯이 모두가 주인의 마음으로 돌보는 튀르키예만의 독특한 반려동물 문화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실제로 거리 곳곳에는 물그릇과 사료가 놓여 있고, 상점 앞에는 고양이용 방석이나 작은 집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마치 동물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따뜻하고 공존적인 도시의 모습처럼 보였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니 그 배경에는 오랜 전통과 문화적, 종교적 의미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이슬람 문화에서는 고양이를 깨끗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여기는 전통이 있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고양이를 아끼고 존중했다는 이야기는 무슬림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종교적 배경 속에서 사람들 역시 고양이에 대해 자연스럽게 호의적이고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개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일부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개를 부정한 동물로 보는 시각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로 인해 반려견을 집 안에서 키우기보다는 외부 공간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거리의 개들은 유기견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지역사회 전체가 함께 돌보는 ‘공공의 개’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귀에 부착된 태그는 지방정부가 중성화 수술을 한 후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냈다는 표시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는 무분별한 개체 수 증가를 막기 위한 정책으로, 안락사 대신 공존을 택한 것이다.
이처럼 튀르키예 거리에서 만난 고양이와 개들은 단순한 동물을 넘어, 도시의 또 다른 시민이자 이웃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우리는 보통 반려동물을 ‘키운다’고 말하지만, 이곳에서는 ‘함께 살아간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지만, 동시에 누구에게나 보호받는 존재. 그들의 존재는 도시의 풍경을 한층 더 인간적이고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모두가 애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양이와 개가 사람에게 달려들어 반가움을 표현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멀찌감치 물러서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작년 아들이 이스탄불을 여행하던 중, 길거리 개를 이쁘다고 쓰다듬다가 손을 살짝 물린 적이 있었다. 혹시 광견병에 노출된 것은 아닌지 걱정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자유로운 존재에게는 인간과의 친숙한 경계선이 필요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모습에서 오히려 유기견과 비슷한 상처와 경계심이 엿보이기도 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내리자마자 달려와 사람들을 반기는 개들, 디저트를 먹고 있는 내 품에 불쑥 안겨오는 고양이, 그리고 강아지를 쓰다듬자 질투심에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또 다른 개. 이 모든 모습은 마냥 사랑스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혼란스러웠다. 왜 이토록 사람을 잘 따르기도 하고, 또 경계하기도 할까. 누군가의 품에 안겨 사랑을 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기에 생긴 불안정한 정서일지도 모른다.
내일이면 작은 아들이 반려견을 데리고 우리 집에 며칠간 머물 예정이다. 사실 아들의 방문보다도 반려견을 맞이할 기대감이 더 크게 느껴지는 건, 강아지를 분양한 후 우리가 오랜 시간 애정을 나누며 키워온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 반려견은 늘 따뜻한 공간에서 사랑받으며 자라왔기에, 사람을 반기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튀르키예의 개들과 고양이들은 그런 환경에 익숙하지 않기에, 때로는 사람 자체가 경계의 대상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튀르키예의 거리에서 마주한 고양이와 개들은 이방인의 눈에 단순한 동물이 아닌, 사회적 존재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 풍경이 항상 따뜻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 안에 내재된 자유와 상처, 인간과의 미묘한 거리감이 동시에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튀르키예에서의 여행의 만남은 나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종교와 문화가 다른 공간을 여행한다는 것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그들 삶의 방식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배경과 문화적 토대는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도 깊게 스며 있다. 튀르키예의 길 위 동물들을 보며, 우리는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긍정의 시선과 수용의 마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고 돌아온 여행이었다.
*2025.5.14.오전 튀르키예 휴게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