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도, 국경도 넘는 거리 정서를 건네는 풍경
군밤장수는 한국에만 있는 줄 알았다.작년에 이탈리아를 여행했을 때, 거리에서 군밤을 파는 장수를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신기하기도 하고 낯익기도 했던 그 순간, ‘군밤장수는 한국 겨울철의 전유물’이라는 내 생각이 깨졌다. 이탈리아 거리에서 리어카에 군밤을 굽는 모습은 마치 한국 도심의 인도 한복판에 옮겨 놓은 듯했다. 다만 그때가 겨울이라, ‘역시 군밤은 겨울에만 존재하는 계절 장사겠지’ 하는 생각은 여전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뜻밖에도 이스탄불에서 군밤장수를 만났다. 그것도 겨울이 아닌 오월의 따뜻한 봄날, 인파가 북적이는 시장가 인도 한복판에서였다. 그 장면을 본 순간, 내 머릿속 고정관념이 한꺼번에 두 가지나 깨졌다. 군밤장수가 한국과 이탈리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겨울에만 등장하는 존재도 아니었던 것이다. 군밤 냄새가 풍기는 그 풍경은, 무척이나 이질적이면서도 동시에 익숙했다.
한국의 겨울을 떠올리면 거리의 소리부터 생각난다. 포장마차에서 나는 어묵 국물 끓는 소리, 호떡 지지는 기름 소리, 그리고 “메밀묵이요~ 찹쌀떡이요~” 하고 골목을 누비던 장수들의 외침. 그 속에는 늘 군밤장수가 있었다. 리어카에서 밤을 굽는 연기, 까맣게 그을린 손, 밤 껍데기를 까며 웃는 얼굴. 어린 시절, 추운 겨울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그 풍경은 마치 계절의 알림장 같았다. 그래서 군밤장수는 늘 ‘겨울’과 함께 기억되었고, 나에게는 한국만의 정서였다.
하지만 이스탄불의 봄날, 낯선 시장 한복판에서 만난 군밤장수는 내 그 모든 인식을 다시 뒤집었다.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군밤장수도 리어카를 끌며 인도 위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굽는 방식도 비슷했고, 풍기는 냄새도 익숙했다. 문화도, 언어도, 피부색도 모두 다르지만, 누군가의 일상 속에는 나의 과거와 비슷한 모습이 있다는 사실이 낯선 도시에서 이상하리만큼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 나라 사람들에게 군밤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계절의 감각과 어린 시절의 추억이 스며든 음식일지도 모른다.
사실, 단지 군밤장수를 봤다는 것만으로는 이토록 인상이 깊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모습이 마치 한국의 거리 풍경과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에, 반가움이 더 컸다. 마치 오랜만에 고향 친구를 길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마음이 놓이고 따뜻해졌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리에서 스치는 짧은 장면 하나가, 마음속 깊이 오래 남는 기억이 되었다.
살아보니,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달라도 ‘공통된 무언가’를 마주하면 갑자기 친숙해지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특히 캐나다처럼 다양한 인종이 함께 어울려 사는 나라에서는 이런 순간이 종종 찾아온다. 예를 들어, 외국인이 김치를 먹고 “맛있다”라고 말할 때, 이유 없이 반가워지고 정이 간다. 어쩌면 이건, 오래 해외에 살면서 스스로 길러진 일종의 정서적 반사작용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해외의 어느 거리에서 한국과 비슷한 장면을 마주할 때, 나는 낯선 곳에서도 갑자기 안도감을 느낀다. 이스탄불의 봄날, 인도 위에서 리어카를 끌며 군밤을 굽던 장수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계절도, 국경도, 언어도 다르지만, 그 거리의 풍경은 나의 과거와 잇닿아 있었다. 그것은 단지 먹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정서를 건네는 하나의 장면이었고, 오랜 시간 내 안에 자리 잡은 ‘겨울의 기억’이 뜻밖의 봄날에 다시 피어난 순간이었다.
https://v.daum.net/v/202505281327010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