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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턱에서 삶을 다시 묻는다

캐나다에서 마주한 죽음과 드라마 <메리킬즈피플>이 던진 질문

by 김종섭

캐나다에 막 정착했을 때의 일이다. 아내의 지인의 아들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부부는 황급히 병원을 찾았다. 그곳은 영안실도, 장례식장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중환자실도 아닌 바로 일반 병실이었다.

젊은 아들은 이미 의사로부터 사망 선고를 받은 상태였다. 일반적이라면 흰 천으로 덮여 영안실이나 장례식장에 있어야 할 상황이었지만, 그는 침대 등받이를 거의 90도 가까이 세워 의자처럼 만든 자세에서 앉아서 마치 산 사람처럼 몸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다.


사망하기 전 장기를 단체에 기증해서 일부 장기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방문한 사람들은 마치 병문안을 온 것처럼, 죽은 이를 환자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은 죽음을 슬퍼하며 애도하는 공간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생명을 잇는 순간이자,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신비로운 자리였다.


"우리 아이는 죽지 않았어요. 지금 잠시 자고 있을 뿐이에요."

자식을 떠나보낸 엄마는 슬픔을 속으로 꾹 눌러 담으며 태연한 척했지만, 그 모습이 안타깝고 가슴 아리게 다가왔다. 잠시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잠든 것 같았지만, 세상과의 이별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 장면 앞에서 나는 숨이 멎는 듯한 충격과 함께 깨달았다. 죽음이 반드시 끝은 아니라는 사실을. 한 사람의 죽음이 다른 생명을 살리는 시작이 될 수 있음을,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최근 본 MBC 금토 드라마 <메리킬즈피플>은 그때의 기억을 다시 불러왔다. 드라마 속에서는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안락사를 돕는 의사와 이를 추적하는 형사의 이야기는, 삶과 죽음, 옳고 그름의 경계를 섬세하게 탐색한다.


지인의 아들은 선택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 죽음은 장기 기증을 통해 또 다른 생명을 살리는 숭고한 의미를 지녔다. 반면 드라마 속 인물들은 고통의 끝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야 했다. 한쪽은 ‘주어진 죽음’을, 다른 한쪽은 ‘선택한 죽음’을 마주한다. 죽음의 형태와 결은 다르지만, 두 경우 모두 우리에게 묻는다. 죽음은 끝인가, 아니면 또 다른 삶으로 이어지는 문인가?


우리는 흔히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라는 속담을 떠올리며, 어떤 고통 속에서도 삶을 부여잡는다. 그러나 때로는 삶이 죽음보다 더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다. 살아 있음이 고통일 때, 끝내 해방을 선택하는 것이 더 인간다운 선택일 수도 있음을 드라마와 현실은 동시에 보여준다.


삶과 죽음은 결코 흑과 백처럼 단순히 나눌 수 없다. 선택하지 못한 죽음도, 선택해야 하는 죽음도, 결국 우리 모두에게 닥칠 운명이다. 다만 그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마주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누구나 서툴다. 그러나 어쩌면 그 서투름 속에서, 우리는 살아 있음의 의미와 무게를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라면, 삶과 죽음의 경계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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