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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도서관에서 신문 한 장이 건넨 사색

종이신문에서 디지털 홍수로… 기억과 만남의 매체를 돌아보다

by 김종섭

도서관 창가 쪽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옆에는 일흔을 넘어 보이는 노인분이 앉아 있었고, 잠시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분은 낡은 휴대폰을 손에 들고 무언가를 보고 있던 중, 무릎 쪽에 내려놓은 신문을 집어 들며 “신문 보시겠어요?”라고 건넸다.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그 작은 제안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잠시 뒤, 노인분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아까 내게 건네려 했던 신문을 펼쳤다. 오래되어 낡은 휴대폰은, 액정 대신 비닐로 덮여 고무줄로 묶여 있었다. 속도는 느릴 듯했지만, 신문을 읽는 그분의 눈빛은 느리면서도 또렷하게 집중되어 있었다. 노인분이 신문을 읽는 모습을 보며 문득 내 기억 속에서 신문이 차지하던 자리가 떠올랐다.


출근길 전철역 간판대에서 신문 한 부를 사서 읽으며 출근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모두가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신문 대신 화면 속 뉴스로 하루를 시작한다. 처음 캐나다에 이민 왔을 때도 마트 입구마다 한인신문이 가득 쌓여 있었다. 주 4회(화, 목, 금, 토) 발행되던 신문은 광고까지 빼곡히 실려 두툼했고, 마치 한 권의 주간지를 보는 듯했다. 발행일마다 일부러 챙겨 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늘은 인터넷에서 뉴스를 읽었다. 종이신문에 비하면 정보의 폭은 훨씬 넓다. 그러나 활자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읽던 신문과 달리, 화면 속 글자는 눈앞을 빠르게 흘러간다. 마치 시간에 쫓기듯, ‘더 많이 읽어야 한다’는 압박도 없는데 손끝과 눈은 저절로 빨라진다.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여유는 사라지고, 읽는 행위마저 어떤 것을 '사냥'하듯 변해버린다.


얼마 전에는 한 신문 기사에서 오타를 발견했다. 꼼꼼히 읽지 않았는데도, 오타만은 이상하게 눈에 확 들어왔다. “K청장은 제19·30·21대 국회의원을 지냈고”라는 문장이었다. 20대가 맞는데 30대로 잘못 표기된 것이다. 기사를 살펴보니, 작성한 기자 세 명의 이름과 이메일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중 한 명에게 오타를 알려주는 메일을 보냈다. 오타를 발견해도 그냥 넘어갈 때가 많지만, 때로는 꼭 알려야 할 것 같아 제보하게 된다. 어떤 매체는 응답이 없기도 했지만, 어떤 곳에서는 고맙다며 발행 도서를 선물로 보내주겠다고 답하기도 한다. 작은 오타 하나가 매체의 신뢰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그때마다 새삼 느낀다.


내가 쓴 글 속 오타는 잘 보이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남이 쓴 글에서는 오류가 금방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인터넷 환경에서 쓰인 활자가 더 선명하게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사)국어문화원연합회에서 메일을 받기도 한다. 예전에 ‘키오스크’라는 외래어를 기사에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무인 안내기’ 같은 쉬운 말을 쓰자는 권유 메일을 받았다. 그럴 때면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 하나하나까지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세상이 정교하다 못해 조금은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오늘 도서관에서 노인분이 건넨 신문 한 장은 작은 호의였지만 내겐 그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 그 작은 순간이 나를 과거의 신문 기억으로, 그리고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으로 이끌었다. 종이신문이 주던 느림과 여유, 그리고 인터넷이 요구하는 속도와 긴장감 사이에서 나는 다시 묻게 된다.


신문 한 장이 전하는 작은 호의는, 오늘날 빠르게 흐르는 정보 속에서도 잠시 멈춰 여유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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