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이후, 감정과 취향 그리고 하루의 속도가 바뀌어 가는 시간
60대에 접어들며 달라진 것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인생 2막이란 말처럼, 삶에 막 발을 들인 초년생이 되어 있었다. 늘 젊음이 영원할 것만 같았던 믿음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금이 갔다. 어느새 조용히 뒤집히듯 60대라는 대열 안에 들어와 있었다.
세상이 변해도 사람의 취향과 감정만큼은 그대로일 것이라는 믿음 역시 60대에 접어들면서 자연스럽게 흔들렸다. 그 사이, 삶의 방향은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었다. 지금의 자리가 어색하게 느껴지면서 분명 이전과는 다른 자리에 서 있었다.
한국을 떠나 캐나다에 정착해 살아온 지도 십여 년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이곳에서 ‘은퇴 이후의 시간’을 맞이하게 될 줄은 미처 실감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직장이라는 울타리가 사라지자, 캐나다에서의 삶 또한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내는 오래전부터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늘 드라마를 즐겨 보았다. 연속극이라 하면 흔히 TV 편성표에 맞춰 흘러가는 주말 드라마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넷플릭스에 올라온 작품들을 자연스럽게 골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몇 달 전 처음 알게 되었다. 한국 TV 정규 방송보다는 온라인 영상 플랫폼이 일상이 되어 드라마를 소비하는 방식 자체가 이미 달라져 있었다.
은퇴 이전의 삶은 늘 바빴고, 늘 피곤했다. 그 핑계로 가정 안에서 누릴 수 있었던 TV 시청마저도 시간들 속에 멈춘 채 흘러가 버렸다. 그리고 은퇴 이후, 새롭게 시작된 2막의 삶은 그 멈췄던 시간을 다시 불러내는 과정처럼 다가왔다.
오전에는 산책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두 시간 동안 산책을 하면서 이전에 나누지 못했던 부부의 대화가 더 진솔해졌다. 아내에게는 오래된 재킷이 하나 있다. 어느 날 함께 산책하다가 아내는 문득 입고 있던 그 옷의 무게가 무거워졌다고 말했다. 나이가 들어가니 이제는 예전부터 입던 옷의 무게조차 버겁게 느껴지는 것 같다는 아내의 말에 묘한 공감과 서글픔이 교차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 오전 시간은 어느덧 저물어간다. 오후 2~3시까지는 각자의 취미 활동으로 시간을 보내다, 그 이후가 되면 자연스럽게 그동안 멀리 했던 TV를 보기 위해 아내와 함께 TV 앞으로 다가선다. 겨울이면 이곳 캐나다는 한국보다 일몰이 한 시간쯤 빠르다. 잿빛 하늘과 가느다란 비가 반복되는 날씨 탓에 화창한 날에 대한 기대는 접게 되지만, 덕분에 실내에서의 시간은 더욱 아늑해진다. 특별한 약속이 없는 날이면 아내와 나란히 앉아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두세 시간을 보낸다.
아내와 함께 신작부터 오래된 작품까지 넷플릭스를 켜는 일이 이제는 자연스러운 부부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특히 신작 드라마가 공개되는 금·토·일을 은근히 기다리는 마음까지 생겨났다.
며칠 전부터 방영한 지 오래된 2019년 드라마 <바람이 분다>16부작을 보고 있다. 알츠하이머를 앓게 된 남편과 그를 지키려는 아내의 이야기이다. 이민자로 살아오면서 ‘아프면 누가 곁에 남아줄까’를 한 번쯤 떠올려본 사람이라면, 그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장면 하나하나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손으로 눈물을 닦고 있는데, 그 순간 옆에 앉아 있던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아내도 함께 울고 있을 거라 짐작했지만, 의외로 담담한 표정으로 “당신 울고 있어요?”라며 웃으면서 휴지를 건넨다. 예전에는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흘리던 쪽이 늘 아내였고, 왜 우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이제는 부부 사이에서도 60대에 접어들면서 시간이 조용히 역할을 바꿔 놓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 남성은 감정이 섬세해지고, 여성은 오히려 단단해진다는 말이 요즘 들어서는 본인의 이야기가 되었다.
식성의 패턴 역시 달라졌다. 직장을 다닐 때면 밥심에 살았다. 밥을 먹지 않으면 왠지 온몸에 힘이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햄버거, 빵 종류는 간식일 뿐 한 끼 식사로 인정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쯤 아내와 함께 A&W나 웬디스 같은 패스트푸드점을 찾는다.
캐나다에서의 은퇴 이후 한 끼는 ‘밥의 든든함’보다 ‘단순함이 주는 여유’가 기준이 되었다. 햄버거 세트 메뉴에 커피 한 잔이면 충분하다. 우편함에 꽂힌 쿠폰 덕분에 가격도 한결 가볍다. 집 근처에도 패스트푸드점이 많지만, 굳이 조금 떨어진 곳으로 차를 몰고 가서 먹고 온다. 집에서 짧은 거리 이동이지만, 은퇴 후의 외출은 목적보다 과정이 더 중요해졌다. 그 시간만큼은 짧은 여행을 떠나는 기분으로 운전대를 잡는다.
은퇴 이후, 하루의 구조는 크게 달라졌다. 직장이라는 틀 안에서 정해진 시간과 역할을 따라가던 시절과 달리, 이제는 일정도 속도도 스스로 조절하게 되었다. 캐나다에서의 생활 역시 ‘일 중심’에서 ‘생활 중심’으로 무게가 옮겨갔다.
바쁘다는 이유로 지나쳤던 옛 장면들이 이제는 유난히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젊을 때는 해보지 못했던 일들,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은퇴 이후에야 비로소 삶의 배경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이것이 60대에 들어서며 마주한 변화들이다.
어쩌면 무언가를 새로 얻었다기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음 구간으로 옮겨온 삶일지도 모른다.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 조용한 길로 접어들듯, 삶의 방향은 점점 느린 쪽으로 기울고 있다. 이제는 화려함보다 평온함이, 빠른 길보다 돌아가는 길이 편안하다. 캐나다에서 맞이한 60대의 은퇴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의 삶을 배워가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