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이민 생활 중 감행한 삭발기... 삭발의 간편함과 타인의 시선
가끔은 머리를 아주 짧게 밀어보면 어떨까 생각만 하던 차였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 갑자기 이유 없이 거울 앞에서 내 모습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한 번쯤 머리를 삭발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내에게 의견을 물으니 갑작스러운 남편의 제의에도 놀란 기색 없이 "당신이 좋으면 마음대로 하라"며 남편의 자율적인 의사를 존중해 주었다. 그 응원에 힘입어 화장실에서 이발기를 들었다.
손이 가기 쉬운 앞머리부터 조심스레 밀기 시작했다. 손길이 닿지 않는 뒷머리도 다소 힘들어도 혼자 해결하려다가 아내의 손을 빌려 깔끔하게 정리했다. 거울 속 모습은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아내 역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보기 좋다면서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런데 삭발한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거울 속에는 수십 년 전 내 백일 사진 속 아이의 얼굴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세월의 풍파를 겪은 얼굴 위로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 묘하게 겹쳐 보였다.
머리를 감으며 느낀 감각은 익숙하지 않고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통 전체가 한 손에 잡히는 생경한 느낌을 체험하며, 그동안 내 머리를 감싸고 있던 머리카락의 존재감을 새삼 감사함으로 느끼게 되었다. 수건으로 몇 번 쓱 닦아내기만 하면 끝나는 간편함이 일단 무엇보다 좋았다. 하지만 한편으론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며칠 전 암 치료를 위해 삭발한 아내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똑같이 머리카락이 없는 상태라도, 누군가에게는 자발적인 선택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투병의 상징이라는 점이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했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행위 하나에도 이토록 다양한 삶의 맥락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교복과 두발 규제를 겪은 마지막 세대다. 1982년 고교 졸업과 함께 두발 자율화가 되었고, 이듬해 교복 자율화가 시작됐다. 군 입대 당시 삭발한 이후로 무려 40년 만에 다시 마주한 '까까머리'였다. 강제로 머리를 깎여야 했던 청춘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온전히 내 의지로 선택한 삭발이기에 감회가 더욱 새로웠다.
이번 삭발에는 환경적 요인도 컸다. 내가 사는 캐나다에서는 삭발한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탈모 때문에 선택했든 스타일을 위해 선택했든 그 모습이 결코 낯설거나 어색하지 않다. 아내가 나의 삭발을 흔쾌히 허락한 것도 이런 자유로운 환경 덕분이었을 것이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보라"는 아내의 배려도 큰 힘이 됐다. 주변의 시선보다 나의 행복과 시도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이 이 낯선 도전을 가능케 했다.
삭발 첫날, 아내와 쇼핑몰에 가기 위해 모자를 썼다. 아직은 거울 속 내 모습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모자를 벗는 순간, 아내가 배를 잡고 웃으며 말했다. "준우 아빠, 꼭 교도소에서 막 출소한 사람 같아요!" 나조차 내가 삭발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기에 아내의 농담에 한참을 함께 웃었다.
아내는 덧붙였다. "한국 가기 전에는 절대 삭발하지 마세요." 한국 정서상 삭발은 병자나 출소자의 이미지가 강해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스님의 삭발이 자연스럽듯, 모든 것은 환경과 익숙함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안경을 벗어던지는 연습이 필요한 것은 머리카락뿐만이 아닐 것이다.
삭발한 지 이제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며칠이 흐르면 주변의 반응과 스스로의 만족감에 따라 이 삭발의 의미도 또 달라질 것이다. 다시 예전처럼 머리를 기르게 될지도 모르지만, 당분간은 이 가벼운 해방감을 온전히 즐겨보려 한다. 오늘은 비워낸 머리 위로 닿는 시원한 공기가 제법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