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루 대신 플라스틱에 담긴 먹물이지만 다시 붓을 듭니다

은퇴 후 비로소 시작된 진짜 취미

by 김종섭

캐나다 근교 한인타운에 있는 마트에 들렀다. 한국의 생활용품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곳인데,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한국의 다이소 같은 정겨운 느낌이 전해진다. 물론 품목은 그곳에 비해 다양하지 않지만, 캐나다 일반 마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한국 특유의 아기자기하면서도 실용적인 물건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고 있다. 학용품 코너를 서성이다 발길이 멈췄다. 그곳엔 검은 먹물과 붓, 그리고 낡은 기억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조각칼 세트가 놓여 있었다.


문득 학교에 다니던 시절 내가 무엇을 좋아했었는지 떠올려 보았다. 서예 시간에 은은하게 퍼지던 먹향과 정성스레 먹을 갈았던 시간이 생각났다. 미술 시간엔 조각칼로 나무를 깎아 무언가를 만들던 목공 작업에 꽤 몰입하곤 했었다. 마침 며칠 전부터 서예와 나무 조각을 배워볼까 고민하던 차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 도구들을 운명처럼 마주한 것이다.


아쉽게도 묵직한 돌벼루와 먹은 없었다. 대신 작은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먹물이 아쉬운 대로 눈에 들어왔다. 사실 서예의 참맛은 벼루에 먹을 천천히 갈며 마음을 가다듬는 '기다림'에 있기도 하지만, 지금은 이 간편한 먹물이라도 감지덕지한 일이다. 직접 먹물을 만드는 과정을 누릴 수 없는 아쉬움은 남지만, 이 먹물 한 병이면 언제든 하얀 화선지 위에 마음먹은 글귀를 써 내려가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아 본다.


은퇴 후 맞이하는 인생 2막은 이처럼 과거의 기억을 답습하거나, 예전에는 생각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꿈을 다시 시도해 보는 시기인 것 같다. 학창 시절 특활 활동이나 미술 시간에 잠깐 배웠던 것들을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이제야 온전한 내 취미로 뿌리내려 보려 한다.


사실 은퇴 전에는 먹고사는 일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취미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경제 활동 대신 '어떻게 하루를 규칙적이고 가치 있게 보낼 것인가'가 삶의 관건이 되었다. 취미는 이제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취미 자체가 어느새 삶이 되어갔고, 일상의 루틴을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소중한 장치가 되어가고 있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시력이 흐려지거나 손끝 힘이 부족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내 몸과 마음이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들을 우선순위에 둔다. 재미와 성취감을 동시에 느끼며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는 이 과정 자체가 즐겁다.


화선지에 어떤 문구를 먼저 써 내려갈까. 목판에는 어떤 그림이나 글자를 새겨 넣을까. 붓과 먹물을 사가지고 돌아오는 길, 머릿속은 이미 기분 좋은 상상으로 가득 차 있다. 오늘은 무언가를 완성하기보다, 그 창조적인 시간을 맞이할 '생각의 준비'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른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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