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캐나다 중고 매장 앞, 노신사가 내려놓은 '세월의 무게
캐나다에는 '밸류빌리지(Value Village)'라는 유명한 중고 매장이 있다. 개인들의 기부 물품을 받아 운영되는 이곳은 누군가에게는 쓸모 없어진 물건이 다른 누군가에게 새로운 가치로 태어나는 곳이다. 비가 내리는 오후, 우리 부부는 오래된 침대를 새로 바꿀까 하는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가 잠시 구경이라도 할 겸 밸류빌리지 매장을 찾았다. 그런데 매장 입구로 향하던 중, 한쪽 기부 구역(Donation Center)에서 발길을 멈추게 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한 노신사가 차 트렁크와 뒷좌석까지 가득 채워온 살림살이를 묵묵히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많은 짐을 한꺼번에 기부센터에 가져오는 모습은 이곳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옆에 있던 아내가 말했다.
" 혹시 할아버지가 집을 줄여 이사를 가시거나, 집안을 통째로 정리하시는 모양이에요". 7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먼저 떠난 배우자의 유품을 정리하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상상해 가면서 왠지 모를 마음 한구석이 아련해졌다. 차에서 내려지는 물건 하나하나에는 할아버지가 통과해 온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사실 우리 부부도 수년째 써온 낡은 침대 때문에 잠자리가 예전만큼 편치 않아, 몸을 편히 뉘일 좋은 매트리스와 널찍한 침대를 바꿀까 하는 생각으로 쇼핑길에 나서던 중이었다. 노인분이 차 안 가득 실린 짐들을 바라보며 우리 부부는 묘한 울림을 받았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부부 역시 불필요한 짐을 줄이고 꼭 필요한 물건만 곁에 두자고 다짐하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가져온 물건들을 보면서 새로 채우려는 욕심보다 비워내는 뒷모습이 더 크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시간 날 때마다 집안 구석구석을 정리하지만, 버려도 버려도 버릴 것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몇 년 동안 손 한 번 대지 않았으면서도 '언젠가 쓰겠지' 혹은 '아까워서'라는 미련으로 움켜쥐고 있던 것들이 태반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물건을 정리하는 손길이 과감해지는 것은, 화려한 소유보다 단순한 일상이 주는 평온함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과거 어릴 적 한국에서는 세상을 떠난 이의 유품을 소각하는 모습을 흔히 보았다. 죽은 이의 흔적을 사용하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탓이다. 하지만 이곳 캐나다의 중고 매장에는 누군가 입던 옷부터 신발까지 빼곡하다. 그 안에는 분명 먼저 떠난 이들의 유품도 섞여 있을 터다. 타인의 취향과 세월을 흔쾌히 이어받는 사람들을 보며, 물건에 깃든 미신적인 불안함보다 '재활용'과 '순환'이라는 실용적 가치를 먼저 배우게 된다.
젊었을 때는 크고 화려한 가구로 집안을 채우는 '살림 늘리는 맛'에 살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과한 살림은 삶을 짓누르는 부담스러운 짐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생 2막'이란 단순히 은퇴 후의 남은 시간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소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비워내는 연습을 하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결국 우리 부부는 값비싼 침대와 매트리스 앞에서 발길을 돌려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침대가 주는 안락함보다, 지금 가진 것을 잘 갈무리하는 마음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새로 사는 것보다 이미 가진 것을 비워내는 일에 길들여져 가는 우리를 발견한 날이었다.
기부 센터에 차 가득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떠나던 그 노인의 모습은 머지않아 마주할 우리 부부의 미래이기도 하다. 노후에 가장 먼저 행해야 할 덕목은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보내주는 것'임을, 비 내리는 밸류빌리지 주차장에서 다시금 마음 깊이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