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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섭 Aug 02. 2022

진심의 관계

남이 내가 될 수 없고 내가 남이 될 수 없었다.

소통은 관계의 시작이었다. 관계는 변곡점이 수시로 존재했지만, 관계가 돈독한 사람들에게는 일정한 공통분모 형태의 향이 존재했다. 문득  "만나면 좋은 친구"라는 어느 방송사 로그송이 생각난다.  흔히 친구라는 관계는 그냥 조건 없이 만나면 마냥 좋은 친구라고 한치 의심도 없이 가슴 안에 었다. 요즘은 친구의 개념이 바뀌었다. 새로운 친구라도 만나게 되 서로 활력소가 될 수 있는 기분 좋은 이야기만 담아냈다. 만남이 끝나고 난 후 왠지 석연치 않은 의심을 품게 된다. 생각의 빈곤한 탓 때문일 수도 있다.


삶에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어느 정도 이해와 관용이 주어질 때도 되었는데 아직까지 성숙한 삶이 못 되는 미완성이다. 어떨 때에는 생각 없이 습관처럼 절벽 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지극히 평범한 관계는 김치를 담글 때 양념을 대충 얼버무리는 것 같아 보이지만, 입가에 와닿은 맛 감은 양념이 골고루 섞인 공평된 맛을 전달했다. 모름지기 양분된 섞임의 철학이 관계의 시발점일 수도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이에  대화 형식적일 수도 있는 공통어를 만나게 된다. 어느 정도(?) 대화를 실현하다 보면 상대의 진심의 의도를 진중하게 읽어간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상대의 마음, 이와는 달리 오랜 시간을 만나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의 형태, 생각에 따라 유형은 제각각이었다. 지나친 관심으로 상처가 될 수 있는 만남도 있었고, 대충 존재감 없이 바람처럼 지나치는 사람도 있었다.


소통하는 사람과 어느 정도 대화를 실현하다 보면 느낌이라는 가슴의 알림이 존재했다.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하는 쪽보다는 묵묵히 들어주는 사람에게 먼저 관심이 집중되어갔다. 들어주는 연습이 부족한 탓에 혼잣말처럼 일방적인 대화의 끝을 가져올 때도 있었다.


우리는 만남이라는 관계에 있어 얼마만큼 서로의 믿음에 충실했고 또 진실했을까, 말을 하고 또 들어줄 때도 영혼 없는 무감으로  상대의 감정에 흠집 낼 때도 있었다. 간혹, 대화라는 언어의 습관이 마약과도 같은 위험한 존재감도 있었다. 


관계는 낯선 상대를 알아가기 위한  4살 배기 어린애가 되물어보는 물음표가 존재했다. 어떤 때에는 상대를 알기도 전에 불신으로 가득 찼다. 서로에겐 얼마만큼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때론 안에도 내가 아닌 마음에 분심이 생겨났다. 불신은 믿음을 주지 못한 양심의 부재일 수 있다. 결코 상대가 내가 될 수 없음에도 나와 같기를 바란다. 관계의 순위는 누가 먼저일 수 없다. 서로의 노력이 필요했다. 성급히 알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성급한 판단이 상처가 되어갔다.


요즘 사람들을 대하면서 연구자 같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 때가 많다. 만나면, 대화의 시작은 주변 사람 흠집 내기에 바쁜 일상경험하게 되면서 적지 않은 회의감을 느끼게 다. 믿음보다는 의심이 앞서는 이유의 충돌, 이해의 의도가 자유로운 마음을 품지 못했다. 나도 누군가의 눈에 나와 같은 생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시 시간의 흐름을 돌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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