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누님으로 부터 무공 훈장이담긴 카톡 사진을전해 받았다. 카톡사진에는6.25 무공훈장 수훈 기념패와 함께무공훈장과훈장증서까지카톡에가득담겨 전해져 왔다. 일단,사진 내용은너무나 풍성했다. 정부에서실행하는6.25 참전용사 무공훈장 찾아주기사업에 아버지가수혜자의 자격을 얻으신 것이다.오랜 세월유공자를 위한 예우가 정체되어 있던 아쉬움은 있었지만, 사진으로 나마 훈장을 보는 순간타협과 절충 끝에 생겨난 화해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아버지에게는 명예로운 역사적인시간이다. 그것도 생각을 얻어내지 못한무공훈장과 국가 유공자라는 값진 것을 한꺼번에두 가지를 얻어 냈기 때문이다. 이는자식은 물론자손에게도 경사스럽고도 자랑스러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번정부사업의 일환으로 펼쳐지고 있는 6 25 참전용사 무공훈장 찾아주기 프로젝트를 통해 국가에 대한 불신을가졌던 생각이 신뢰라는 회복을 가져다주었다.하지만,아버지가세상과 이별을 하신 지반세기가 훌쩍 넘은세월의 안타까움이 사실 존재하고 있다. 또한 6 25 전쟁 발발 73년이라는 긴 세월을 묵묵히 건너온 역사도 있다.
며칠 후 누님께서 또 다른 내용을 가지고 연락이 왔다. 누님의첫마디가 왠지 격양되어 있음을 순간 직감했다. 그 내용인즉, 유가족이 희망할 경우 아버지 유해를 국립현충원으로 모실 수 있다는반가운소식을 첨언하였다.전직몇몇 대통령마저현충원안장에배제된 상황을 비추어 볼 때 아버지가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을 놓고 보아도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없다.
현충원 안장소식이 있고 난 후,누님과 형님은 아버지의 산소 이장계획을 빠르게 실행해나갔다. 우선선산에있는아버지의분묘를 파묘하여 시신을 수습하였다. 수습한 아버지의 유골은 곧바로화장터로 향했다. 화장시간은 한 시간가량 소유가 되었다. 화장이 끝나고 곧바로유골함을 인계받아서울 동작국립 현충원으로 출발제2충혼당에 도착했다. 최종안치 완료 시간은 오후 다섯 시, 이른 아침 서둘러 산소이장을 끝내고 현충원까지빠르게 기념비적인 일을 단 하루 만에 마무리하였다.
아버지가 안치되어 있는 국립 현충원충혼당에는어머니까지도 사망을 염두에 두고 아버지 유골함과 나란히 안장할 수 있는 공간마련 해 준 정부의 극진한 예우까지 이번 행사에 담겨있었다.
무궁훈장과 훈장증, 무궁 훈장 수훈 기념 패까지 감격의 순간을 보탰다.
아버지 세대는 국가가개인에게무엇을 해주었는지의개인적고민과 이해보다는 동족 비극이라는 암울한 격동의 시대라는 커다란6. 25 전쟁이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가 국민을 위한 일보다는 국민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 세대6.25 전쟁은 참으로많은 젊은이들이이 땅에 무수한 피를 수혈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73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노년이라는 세월을 맞이하고 있다. 현대 세대는 백세 인생이라고는 하지만,6.25 참전 용사들의 생존해 계신 분들은생각보다그리 많지 않았는 것이 또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먼저 생각을 꺼내어 낸다.
국가를 떠나 살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이민자 대부분이 반 한국사회적인 기류를 타고 이민의 길을 최종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들대다수가 애국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을까,라는 의문에 개인적생각으로는동의하지 못하고 사실 반신반의하며 살아왔다.
하지만,성장하는 모든 동식물에게도 기반이 될 수 있는 뿌리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사람에게는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태어난 곳 곧, 국가를 근간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 그 뿌리의 원천은 조국이고 그 조국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민자 모두는 한국적인 정서를저버리고 타국에서의 삶을 영위해 가고는 있지만, 본래의 잠재되어있는심성은 한국인이라는 것을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조국이라는그리움의 향수를 마음에 담고 살아가고있지는 않을까, 이번 행사를 통해직. 간접적으로 참전용사의 예우를경험하고 조국을 더 감동을 가지고 사랑할 수 있는 순간들이었다. 글을 쓰면서 지면으로 나마다시 한번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진심 어린 정성에감사함을 전한다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