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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섭 Nov 28. 2023

캐나다에는 도심 속에 공윈 묘지가 있다

캐나다 도심 속에 공원묘지가 거주지와 함께 공존한다

장모님이 세상을 떠나가신 지 어느덧  9개월째 접어들고 있다. 물론 장모님 뿐 아니라 어머니까지 몇 달 간격으로 이별의 아픔을 겪었다. 사람 대부분은 마지막 가는 길을 선산에 묻히고 싶어 했다. 자식에게 지나칠 정도로 애정이 있는 부모는 자식이 사는 인근에 마지막 안식처로 삼고 싶어 하셨다. 장모님은 평소 후자의 소원을 품고 계셔기에 자식들과 멀지 않은 공원묘지에 영면하고 계신다.

장모님을 모신 밴쿠버 인근 써리(Surrey)에 위치하고 공원묘지이다

집에서 차로 20분 남짓 달려가다 보면 장모님의 공원묘지를 만나게 된다. 일반적 생각은 공원묘지가 시내 벗어난 외곽지역일 것이라고 대부분 유추하게 된다. 캐나다의 공원묘지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반적인 도심 안에 일반 공원처럼 공원묘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다


장모님이 계신 공원묘지도 예의는 아니다. 공원묘지 입구를 들어서면 정면을 두고  타운하우스 단지가 먼저 눈의 궁금증을 자극한다. 일반 주거지와 자연스럽게 마주하고 있는 관경을 접하게 된다. 한마디로 첫 느낌은 의아스러움이 전부이다. 한국 정서상로는 쉽게 납득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눈으로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도 가능할 수 있는 일일까, 계속되는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저기 앞에 보이는 곳이 타운 하우스가 맞지?"

혹시 공원묘지를 잘못 들어온 것은 아닌가 싶어 눈을 의심한 나머지 아내에게 다시 확인해 보았다.

"왜요? 공원묘지가 맞는데요"

아내는 남편의 질문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어떻게 주거지에 공원묘지를 유치했을까, "

혹시 공원묘지가 들어온다고 할 때 주민들 반대가 심하지 않았을까?"

거듭되는 질문 공세에 아내는 혹시 아침밥을 잘못 먹었나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타운하우스가 먼저가 아닌데 무슨 반대를ᆢ"

"그래? 공원묘지가 먼저!"

"제가 알고 있기로는 공원묘지가 먼저라고 들었어요"

공원묘지 정보에 관해 아내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공원묘지가 먼저 생겨다면 공원묘지 입장에서는 무제이긴 하다. 타운하우스 입주자공원묘지 현황인지하고 입주한 것이 납득이 가지만, 기존의 인근 거주 주민의 경우 아무런 동요나 제재가 없었는지에 관심이 몰리기 시작한다. 물론 거기까지 깊숙한 히스토리는 알 수는 없지만 타운하우스가 들어선 배경을 보면 아마도 동요는 없었을 듯 생각이 들기는 한다. 


밴쿠버에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대부분의 공원묘지가 일반적인 공원처럼 거주지 구분 없이 공존하고 있음을 쉽게 목격을 하게 된다. 이전에는 공원묘지에 관해 관심 없이 사실 눈에서 흘려버렸었다  이번 장모님의 공원묘지 분양을 통해 캐나다 장묘 문화에 대해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가 되었다. 또한, 불 충분한 이해가 충분한 이해로 돌아서기 시작하는 단계가 되기도 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유교문화에 근간을 두고 있다. 조상에 대한 예절 또한 엄격했다. 집과 산소는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들이 규칙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뒷간과. 처갓집. 묘소등등이 일반적인 예시이다. 예전에는 매장 문화 이외 납골 문화는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다. 사람이 죽으면 무조건 매장 문화가 되었고 집과 떨어진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 극히 일반적이었다. 현대사회에 접어들면서 공동묘지와 납골 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요즘은 대중화 추세에 있다. 하지만, 매장의 원칙을 담고 있는 묘지 문화와 별반 다를 것 없이 혐오시설에 종속되어 가는 일은 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의 장례 문화는 혐오시설이 주거지 근처에 유치가 공표되면 일단 생존건 보장을 먼저 내세우고 사생결단 시설 유치를 강력하게 밀어내기 위한 투쟁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다"라고 했던 어느 작가의 글을 인용해 본다. 죽음이 가볍기 때문에 자신의 남은 삶의 무게를 버텨낼 수 있다는 말에 왠지 죽음 앞에 경건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인간임에 틀림이 없다. 인간의 죽음을 혐오시설로 규정하는 태도 또한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을 캐나다 장묘 문화를 통해 느낄 수 다. 심지어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화장실 청소나 건물 청소 따위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천대 시 하는 풍조가 아직도 사라지고 있지 않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학습에 포함시켜 놓고도 현실은 천한 일로 내몰려 있는 상태이다. 자신의 배설물을 처리한 자리에 남이 그 자리를 청소를 해 주다 실상 돈을 받고 하는 일이긴 하지만 고마운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들 스스로가 괜한 것을 가지고 구분된 울타리를 만들어간다. 결국엔 사람 위에 사람 없다.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만물의 영장이라 명명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제일 두려움의 상대로 규정하고, 인간이 인간의 잔유물을 제일 더럽게 생각한다는 점이 왠지 씁쓸하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자리가 사람을 만들어가고 있다.


생명의 존중함이 중요하듯이 마지막 가는 장소 또한 존중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생소하게만 생각했던 장례 문화적인 측면에 개인적인 잘못된 생각의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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