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아묻따 로맨스 지지자’였다. 현실 세계에서 스트레스는 충분히 받고 있으니 드라마에서만큼은 모든 걸 잊고 아름다운 사랑만을 감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고구마 먹은 것처럼 답답하고, 때로는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무서운 장르물의 세계로 뛰어들게 된 것은 장르물이 가진 강렬한 자극 때문이다. 매화 뒤통수를 100번도 넘게 때리는 듯한 장르물을 한번 보고 나니 나머지 드라마는 밋밋해 보였다. 행복 가득 로맨스만 즐기던 나는, 어느새 큰 충격을 주는 결말에 밤새 사람들의 ‘궁예 글’을 찾아보기도 하고, 고구마 100개 먹은 듯한 서사에 가슴을 치면서도 본방을 기다리며 TV 앞에 앉아있기도 했다.
올해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르물은 단연 <365 : 운명을 거스르는 1년> 이었다. 탄탄한 구성과 말이 필요 없는 연출은 나를 급속도로 이 드라마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MBC도 타 케이블 채널들 못지않게 장르물을 잘 할 수 있구나!’를 느끼게 된 것도 이 드라마 덕분이었다. 그런 MBC가 또 하나의 장르물인 <십시일반>으로 돌아왔다. 심지어 8부작으로 이루어진 콤팩트한 블랙 코미디란다! 기대를 안 할 수가 없다.
십시일반이라는 제목 때문일까? 이 드라마는 유독 식사 자리를 부각한다. 메인 포스터에도 식탁과 식탁에 마주 앉은 가족들(이자 용의자들)이 보인다. 단순히 제목에서 출발한 이미지 일 수도 있지만, 작은 것 하나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장르물 덕후의 입장에서 식탁이라는 오브제가 의심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사건의 실마리를 어쩌면 이들이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유대감이라고는 0에 수렴하는 이 콩가루 같은 가족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을 수 있었던 것이 식사 자리뿐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모두가 웃고 있는 포스터에서 혼자만 굳은 표정으로 우리를 응시하는 유빛나의 표정도 눈이 간다. 빛나는 무엇을 알게 되는 걸까? 혹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1화의 엔딩은 화가 유인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보여주며 추리의 시작을 알렸다. 유언장 공개를 앞둔 유화백의 생일 파티에 모인 가족들은 가족애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지만, 재력가인 유화백의 상속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런 그들이 한데 모인 저택에서 갑자기 유인호가 죽었다. 유언장 공개를 하루 앞둔 채.
이 스토리를 듣고 <나이브스 아웃>이 떠오른다면, 맞다. 진창규 PD 또한 이 드라마의 내용이나 소재가 <나이브스 아웃>과 유사한 점이 있음을 시인했다. 하지만 <십시일반>은 드라마의 특성을 살려 해당 영화보다는 더 깊이 있는 스토리와 캐릭터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아직 초반부이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알 수는 없지만, 이 드라마가 보여줄 캐릭터들의 비밀이 벌써부터 궁금하다. 함께 자란 유빛나와 독고선은 왜 앙숙이 되었으며, 유빛나가 마주하는 어린 시절의 환영은 어떤 사건을 보여주는지. 나아가 유화백의 친구이자 매니저인 문정욱은 선량한 얼굴로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을지. 모든 인물들이 각자의 비밀을 숨기고 있는 이 비밀스러운 대저택에서 그들의 비밀이 낱낱이 까발려질 날이 기대가 된다.
넘쳐나는 장르물의 홍수 속에서, 시청자들은 어느새 추리 전문가가 되었다. 1화만 봐도 ‘각’이 나온다는 추리의 달인들은 더 이상 뻔한 전개는 거부한다.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는 시청자들을 교란시키며 여기저기에 범인의 ‘떡밥’을 뿌려 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범인을 밝히기 전까지는 열심히 추리하며 쉬이 결론을 내리지 못하던 시청자들이, 범인이 나온 후 돌이켜 볼 때 ‘헐 이런 떡밥도 있었구나!’ 하게 만드는 탄탄한 구성 말이다. 하다못해 남편 찾기도 스릴러 뺨치는 떡밥 회수가 이루어지고 있는 마당에, 장르물이라면 마땅히 ‘아 이 작가/감독 진짜 변태 아냐?’ 할 정도의 완벽한 구성과 짜임새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십시일반이라는 제목 덕분에 시청자들은 벌써 그럴듯한 추리를 끝냈다. 모두의 탐욕스러운 마음, 즉 그들이 먹인 수면제(또는 약)들이 모여 화가의 죽음을 만들어 냈을 거라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추리는 제목과 시놉시스만 보고도 할 수 있다. 말했듯이 우리는 이미 추리의 달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시일반이 정말 그렇게 뻔한 전개로 극을 이끌어 나갈 생각이라면, 다른 요소로 차별점을 두기를 바랄 뿐이다.
마라탕은 늘 맛있다. 하지만 매운맛을 아예 빼 버린 0단계의 마라탕은 어딘가 모르게 아쉬움이 남는다. 이럴 거면 그냥 칼국수나 먹고 말지, 하는 느낌? 혀가 얼얼하고 눈물이 찔끔 나는 자극 때문에 마라탕을 찾는 나에게 자극이 없는 마라탕은 아쉽고, 또 아쉽다. (물론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다.) 지난 2회차로 판단한 <십시일반>은 마치 이 0단계의 마라탕 같았다. 자극적인 콘텐츠를 보고 흔히들 ‘마라 맛’이라고 비유하지 않는가. <십시일반>은 장르물이 가진 마라 맛을 아직 못 보여주고 있다.
‘자극’이 단순한 말초적인 자극, 막장을 바란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탄탄하고 과감한 연출에서 오는 강한 자극이 장르물과 만났을 때, 시청자들을 전율하게 하는 큰 임팩트를 날릴 수 있다. 이를 인지하고 있었던 기존 장르물들은 보통 영화 같은 몰입도 있는 연출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아왔다. <스카이캐슬>의 과감한 사운드 활용이 그랬고, <365 : 운명을 거스르는 1년>의 도전적인 구도들이 그랬다. <라이프 온 마스>의 졸리 효과는 매화 엔딩을 더욱 입체적이고 몰입도 있게 만들었다. 이렇듯 장르물은 조금 더 과감한 연출과 촬영 기법들이 함께할 때 비로소 그 빛을 발휘한다.
하지만 십시일반은 아직 기본 육수 같은 느낌이다. 블랙코미디라는 장르로 포문을 열고 여러 오브제들로 저택의 미장센을 잘 구현해냈지만, 연출은 일반적인 드라마들과 큰 차별점이 느껴지지 않는다. 장르물 애청자들은 이미 <비밀의 숲>, <스카이 캐슬> 등의 밀도 높고 자극적인 케이블 드라마에 익숙해져 있으며 공중파 드라마는 어쩐지 느슨하고 지루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생각을 바꿀 만큼 성공적인 추리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면 지금이야말로 과감한 연출적 도전이 필요한 시점이지 않을까.
* 졸리 효과 : 히치콕 줌이라고도 불리며 줌 인과 달리 아웃을 동시에 하거나, 달리 인과 줌 아웃을 동시에 하는 시각 효과를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