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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쓰는 의대생 Jul 25. 2024

예상치 못한 절망을 극복하는 법

크론병 일기 2. 내가 희귀난치병 환자라고?

크론병을 처음 진단받았을 때가 떠오른다. 나는 수면내시경을 막 끝내고 비몽사몽한 상태로 걸어나왔고 복잡한 표정을 한 엄마가 결과를 말씀해주셨다.


크론병이라는 희귀병이래. 그것도 중증.


나는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듣고만 있었고 담당 교수님께서는 염증으로 가득한 대장내시경 사진을 보여주며 식단관리, 약, 수술까지 이어지는 치료 과정에 대해 설명하셨다. 속으로 무슨 소릴 하는 거지? 하고 생각했고 마치 남의 이야기 인 양 무덤덤하게 결과를 듣고 나왔던 것 같다.

몸 상태는 갈수록 심각해졌고 완치가 거의 불가능한 병이며, 평생 약을 먹어야 하고 심하면 수술까지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연하게도 나는 절망했고 방에 틀어박혔다. 밖에 아예 나가지 않았고 하루에 한 끼도 먹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이 좌절에서 놀랍도록 빠르게 일어섰고 현재, 다시 건강과 일상을 되찾았다. 투병을 통해 내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알았고 예비 의사로서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부턴 그 과정과 도움이 되었던 것들에 대해 적어볼까 한다.


1. 부모님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 조력자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부모님일 것이다. 나만큼, 혹은 나보다도 더 걱정하고 슬퍼하셨을 분들이지만 내 앞에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으셨다. 이 덕분에 나도 절망 속으로 빠져들지 않고 담담하게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확진을 받자마자 크론병 환우 카페에 가입, 내 건강만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두 분 다 맞벌이 중이신 직장인이지만 어머니는 매일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들로 도시락을 싸 주셨고 아버지는 매주 병원까지 나를 데려다 주셨다. 


한 일화로는 가장 증상이 심했을 무렵, 무엇을 먹어도 게워내고 흰밥이나 죽조차 먹지 못했다. 그때 유일하게 좋아했던 것이 달콤한 망고였다. 부모님께서는 그 당시 하나에 몇 만원씩 하던 비싼 망고를 매일 새벽배송해서 하루에 한두개씩 내게 먹이셨다. 그 달에만 몇십 개의 망고를 먹었던 것 같다. 이외에도 아팠을 때 부모님께서 힘든 내색 하나 없이 나를 위해 해주셨던 많은 것들을 기억한다. 아마 부모님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2. 담당 교수님과 예비 의사로서의 나

이렇게 장기적으로 케어해야 하는 질환의 경우에는 몇 년, 길면 몇십 년을 함께해야 하는 담당 교수님의 역할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내가 처음 만난 교수님은 소화기내과의 유명한 교수님이셨지만 크론병에 대해서는 전문적이지 않았다. 치료에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약 처방과 신약인 주사제에 대해 나와 전혀 상의하지 않으셨고 무조건 최근에 나온 신약이 좋은 거라고 하셨다. 몇 달 동안 같은 교수님께 치료를 받았지만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고 아버지께서는 밤낮으로 인터넷을 뒤지며 크론병 전문의를 찾으셨다.


그 결과 나는 새로운 담당 교수님을 만나뵙게 되었고 한 달만에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교수님께서는 내 CT 사진과 증상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며 새로 나온 신약보다는 효과가 빠른 주사제로 통증부터 잡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첫 주사제를 맞고 하루 뒤, 복통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밥도 먹을 수 있었고 학교도 다시 나갈 수 있었다. 교수님께서는 마치 딸처럼 나를 대해주셨고 진료 때는 항상 "내 딸이었다면 이렇게 하라고 했을 것 같다"라는 말을 하셨다. 그 결과 나는 신뢰를 가지고 치료에 임할 수 있었고 이제는 염증 수치가 안정화되어 두 달에 한번씩 검진을 가는 것으로 상태가 호전되었다. 


교수님께서 내게 주신 도움은 크론병 치료가 끝이 아니었다. 명확한 꿈 없이 의대에 입학했던 나는 절망에 빠진 환자에게 의사가 미칠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 깨달았다. 환자가 담당 의사에게 신뢰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투병 기간 동안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지, 깊이 있는 공부와 수련을 통한 진료가 환자에게 얼마나 크나큰 도움이 되는지 경험했다. 이제 크론병 1년째가 되어가고 난 아직도 약을 먹고 병원을 다니고 있지만 교수님처럼 희귀병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해 갑자기 없어진 환자들의 일상을 되돌려 주고 싶어졌다. 의사 또한 언제든 환자가 될 수 있다. 그걸 조금 일찍 경험한 나는 더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3.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

크론병 진단을 통해 일상을 빼앗겼던 나는 진지하게 의대 휴학을 고민했다. 아침에 등교하는 것조차 힘들었고 많은 양의 시험 공부를 소화해낼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투병 초기에 매주 병원을 가야 할 때는 학교에 항상 병결 사유서를 내야 했다. 이런 나를 도왔던 것은 학교 동기들이었다. 몸이 아파 학교를 빠지는 날이 잦았는데 이때마다 동기들은 녹음본과 수업 필기 자료를 보내주었다. 내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항상 몇 명의 동기들에게 꼼꼼히 필기된 수업자료와 걱정 어린 연락이 왔다. 


친했던 동기 하나는 평소에 점심도 잘 챙겨먹지 않으면서 항상 나를 데리고 학식을 먹으러 갔다. 나 때문에 맞은편에 앉아 같이 학식을 먹으면서 나한테 한 수저만 더 먹자고 장난스럽게 말해줬다. 아마 내가 기운없이 식사를 거를까 싶어 걱정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무사히 2학기를 진급한 후 친했던 동기들에게 너희들이 없었더라면 난 아마 휴학했을 거라고,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나 스스로 심적으로도 이 사람들과 함께 6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버텼던 것 같다. 아팠던 동안 그저 받기만 하면서 친구들의 소중함을 새기고 또 새겼다.


물론 아프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나는 건강을 잃었던 동안 얻은 것도 많았다. 사는 동안 넘어지더라도 괜찮다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나도 크게 넘어졌었지만 소중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나 잘 걸어나갈 수 있었다. 삶에서 다시 큰 어려움이 찾아오더라도 나는 이 길었던 반 년처럼 잘 극복해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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