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시를 씁니다.
빨강머리앤을 생각하면 초록지붕 뜰의 포플러 나무가 떠오른다. 앤처럼 이름도 예쁜 포플러 나무.
포플러나무 같은 앤에게, 내 맘대로 시를 써본다.
나의 포플러 나무
시원한 바람이 살랑이는 초록지붕 뜰
줄지어 심겨진 포플러 나무처럼
너의 곁엔 좋은 이들이 가득했지.
그래서일까
너의 상상력은 포플러 나무의 잎처럼 날로 풍성하고,
너의 야망은 포플러 나무의 키처럼 날로 자라났구나.
너를 처음 본 날
마릴라 아줌마는 알았을까,
매슈 아저씨는 알았을까,
네가 초록과 같은 푸르름을 가진 아이란 걸.
네가 초록지붕에 살아서 더 좋아
나는 초록을 좋아하거든
언제든 우울할 때 너를 들춰볼게.
기분 좋은 너의 재잘거림과 예기치 못한 너의 상상에
나의 우울이 너와 같은 기쁨으로 변할 수 있게.
변하지 않는 푸르름을 간직한 포플러 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곧고 당당히 자라나는 포플러 나무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나의 앤으로 남아있어 줘
by. 써니 / 23.9.10일
나의 동심 '빨강머리 앤'
책을 읽고 고르는 것이 지극히 즉흥적인 나는, 아이들과 함께 교보문고에 들렀다가 나의 인생 책 '빨강머리 앤'을 발견했다. 어릴 적 너무 재밌게 읽었던 빨강머리 앤. 책 표지가 초등학교 때 봤던 만화 속 그 빨강머리 앤 이이었기에 더욱 지나칠 수 없었다. '이건 소장각이다' 하며 하나 남은 앤을 잽싸게 집어 들고 집으로 왔다.
아이들이 방학에 접어들면서 '이제 난 꼼짝없겠구나, 나만의 힐링 시간을 반드시 만들리라' 다짐했었는데,
'빨강머리 앤'은 나에게 그 시간을 멋지게 선사해 줬다. 틈만 나면 빨리 앤을 읽고 싶어 안달이 났고, 책을 읽는 일주일 동안도 온통 앤 생각뿐이었다.
생년월일 앞자리가 '8'로 시작하는 나와 비슷한 연령대라면 만화 '빨강머리 앤'을 다 알 것이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상냥하고 귀여운 빨간 머리 앤, 외~롭고 슬프지만 굳세게 자라.
가~슴에 솟~아나는 아름다운 꿈, 하~늘엔 뭉~게구름 퍼져나가네.
빨간 머리 앤 귀여운 소녀♪
빨간 머리 앤 우리의 친구 ♬
가사처럼 빨간 머리 앤은 외롭고 슬픈 처지였지만, 고아였던 자신의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강점인 기발하고 멋진 상상력으로 주변 환경을 바꾸고, 긍정과 밝음의 에너지로 마을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만들었다.
매편마다 사고를 치지만 그것을 커버할 만큼 앤은, 마을 사람들에게 너무 사랑스럽고 없어서는 안 될 에이번리의 소중한 아이였다.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감정을 표출하는 '앤 셜리'가 나는 좋았다.
감정에 쉽게 빠지는 나와 비슷한 앤의 모습을 더 공감하고 좋아했는지 모른다
엄마가 되어 읽는 빨간 머리 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다시 읽은 '빨간 머리 앤'은 나에게 또 다른 감정을 주었다. 내가 이제 어른이 되어서일까? 앤은 여전히 사랑스럽지만 나의 시선은 어느덧 마릴라 아줌마와 매슈 아저씨, 에이번리 마을 어른들이 앤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초점이 맞춰진다.
어릴 땐 앤과 나를 동일시하게 생각했다면, 지금은 어른 입장에서 앤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뀐 것이다.
꼭 엄마가 자식을 바라보는 마음처럼, 엄마미소로 앤을 보게 된다. 그래서 앤이 더 사랑스럽다.
마릴라와 앤의 티키타카도 너무 재미있다. MBTI가 분명 T일 것 같은 마릴라의 말들이 왜 이렇게 매력적인지, 다정하게 대하면 버릇없어질까 봐 어떤 일이든 시니컬하게 앤을 대하는 마릴라의 대사가 눈에 띈다. 그러나 F인 앤도 만만치 않다.
앤 : 아름답지 않은 것들은 불쌍해요.
마릴라 : 행동이 예쁘면 얼굴도 예뻐 보인단다.
앤 : 다이애나가 지금 막 불빛 다섯 번을 보냈어요. 무슨 일인지 궁금해 죽겠어요.
마릴라 : 그래, 죽어서야 되겠니. 다녀오려무나. 하지만 10분 안에 돌아와야 한다. 명심하렴.
앤 : 전 같은 실수는 두 번 저지르지 않아요.
마릴라 : 끊임없이 새로운 실수를 저지르니 좋은 점이 있어도 그게 그거구나.
이렇게 마릴라는 무심한 것 같지만 누구보다도 앤을 사랑했다.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엄마가 되어보니 마릴라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장면에선 눈물이 몇 번 났다. 마흔이 다 되어 읽는 빨강머리 앤은 너무나 슬프다.
기쁨과 슬픔이 극과 극으로 치닫는 순수한 앤.
마릴라는 감정의 기복이 심한 앤을 염려하여,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아이로 키우겠다 다짐한다. 그러나 언제나 발랄함을 장착한 채 불쑥 안겨오는 앤을 당해낼 수는 없다.
친구들 앞에서 자존심을 지키려다 지붕 위에서 떨어진 앤.
앤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혼비백산 달려가는 마릴라. 순간 앤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자식을 가진 엄마들 마음처럼.
마릴라는 어느덧 훌쩍 커버린 앤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앤이 아니라, 숙녀같이 얌전해진 앤의 모습을 보고 설명할 수 없는 슬픈 상실감이 밀려든다.
그런 마릴라에게 앤은 말한다.
잘 모르겠어요. 별로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예쁘고 소중한 생각들은 보석처럼 마음속에 담아두는 게 더 좋아요. 그런 생각들이 비웃음을 당하거나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게 싫거든요.
순수한 어린아이일수록 부끄러움을 잘 모른다. 오히려 엉뚱함이 많다. 인사이드아웃의 엉뚱섬처럼 아이의 마음속 한 부분엔 엉뚱섬이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서 상상력이 자라나고 창의력이 샘솟는 것이겠지.
우리 집 둘째도 아직 엉뚱 섬이 무너지지 않아서인지 어디서든 춤을 추고 엉뚱한 생각을 곧잘 내뱉는다.
하지만 이제 서서히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은 아무 데서나 춤을 추는 동생을 부끄러워한다.
아이들은 점점 크면서 사람들의 시선에 갇혀, 또는 비난의 대상이 될까 봐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모든 행동과 말이 서서히 조심스러워진다. 물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지만, 마릴라도 어느 순간 그렇게 변한 앤이 낯설었던 것이다.
마릴라처럼, 엄마들도 내 아이가 너무 빨리 크지 않기를 바란다.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모습은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겠지.
매슈의 죽음을 겪고 서로를 위로하는 마릴라와 앤.
매슈아저씨는 앤이 조잘대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비록 앤이 하는 말에 '글쎄다'라는 대답뿐이었지만, 누구보다도 앤을 지지했고, 언제나 조용히 뒤에서 응원했다. 앤이 그토록 입고 싶어 하던 '퍼프소매' 옷도 매슈 아저씨 덕분에 입을 수 있었다. 그만큼 매슈는 자상한 아버지와 같았다.
그런 매슈를 잃은 슬픔에 두 사람은 서로를 더욱 의지하게 되고, 비로소 마릴라는 앤에게 진심으로 사랑의 말을 전한다.
우리에겐 서로가 있잖니...
난 널 친자식처럼 사랑한단다.
네가 초록지붕에 온 뒤로
너는 내 기쁨이자 위안이었지.
나는 이 부분에서 정말 눈이 붓도록 펑펑 울었다. 꼭 우리 엄마가 나에게 하는 말 같아서...
엄마도 나에게 '너는 누가 뭐래도 내 딸이고 내 기쁨이야, 엄마는 너 없으면 못 살아'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친자식처럼 사랑해주었다. 이런 엄마가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온전히 살아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혼자가 아닌 의지할 수 있는 '서로'라는 존재 자체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큰 위안이고 힘이 되는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이렇게 앤의 주변에 마릴라 같은 좋은 어른들이 많아 다행이다. 좋은 이들이 많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축복이다. 그들의 사랑을 받아 앤은 더 똑똑하고 야망 있고, 어디서든 당당함을 잃지 않는 소녀로 자랄 수 있지 않았을까.
원하는 목표를 끝까지 이루는 야망을 가진 소녀.
소중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소녀.
비록 곧게 뻗은 길이 아닐지라도 길모퉁이에서 한 템포 쉬어가며 또 다른 길을 기다릴 줄 아는 소녀.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길에 가장 좋은 것이 있을 거라는 당당한 믿음을 가진 자존감 높은 소녀
이런 앤을 난 무척이나 사랑한다.
엄마가 되어 다시 읽어도 '빨강머리 앤'은 여전한 나의 인생책, 여전한 나의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