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길었던 추석연휴에서 난 아직도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다. 시댁을 가지도 않았는데 연휴의 후유증이 너무 컸다. 왜냐?
에버랜드로 예정되어 있던 아들의 소풍이 어린이 통학버스 규정으로 취소되는 바람에, 반드시 티익스프레스를 탈거라고 노래를 불렀던 아들은 며칠 동안이나 투덜거렸다. 그것만 탈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고 했다.(그 정도니?)
그래서 난 아들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려 이번 연휴에,
'환상의 나라 에버랜드'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에버랜드에 언제 가야 좋을지 남편과 눈치게임 작전을 세웠다. 이번 추석연휴가 길어서 많이 분산되지 않을까? 연휴 첫날 차가 좀 막히더라도 사람들이 양가에 인사하러 내려갈 테니까, 정작 에버랜드엔 사람이 적겠지? 이렇게 연휴 첫날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에버랜드 안 식당은 비싸고 사람이 많아 점심 먹기도 힘드니, 난 아침 일찍 김밥을 싸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전날 재료준비도 다 해놓고 잤는데, 정작 알람을 잘못 맞춰서 7시가 넘어 일어났다. 부랴부랴 김밥을 싸고 나니 8시, 이래저래 준비해서 우리는 8시 반에 출발했다. 그래도 네비를 찍으니 한 시간 조금 넘는 시간에 도착예정이라 다행이었다.
그러나 30분 추가, 또 30분 추가, 용인에 거의 다 와서는 1시간 추가. 우리는 강원도 가는 시간만큼, 무려 3시간 만에 에버랜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결국 11시 반에 도착한 에버랜드 정문은 입장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우리의 눈치게임은 실패다.
그래도 환상의 나라에 들어서 정원을 바라보니 기분이 꽤 좋아졌다. 남편은 놀이기구를 못 타니까 1학년 딸과 수준에 맞는 놀이기구를 타기로 하고, 나는 5학년 아들과 함께 티익스프레스를 향해 뛰어갔다.
(현장줄서기만 가능)
두세 번의 계단 줄이 이어지고, 꼬불꼬불 대기줄은 또 한 번 펼쳐졌다. 제일 인기 있는 놀이기구라 하니 나도 나름 기대가 되었고, 120분 대기를 해야 했지만 아들을 위해 기다렸다. 밖에서부터 줄을 서기 시작해 안까지는 금방 들어갔는데 이게 웬걸, 여기서부터는 대기줄이 꼬불꼬불이다.
아침도 못 먹고 왔는데 1시가 다 돼 가니 배가 너무 고팠다. 아들을 설득해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들에게 말했다.
- 이렇게까지 기다려서 꼭 타야 하는 거니? 너 여기서 많은 시간 지체하면 다른 놀이기구 못 타.
- 엄마, 난 여기서 이거 하나만 타도 돼. 나 이거 너무 타보고 싶었단 말이야. 그리고 내가 유튜브 보면서 공부 했는데 티익스프레스는,
길이 1641m
최고높이 56.02m
낙하각도 77도
시속 104km
운행시간 3분 12초의 세계 5위에 속하는 나무 소재 롤러코스터야
- 그.. 그래, 누가 아빠 아들 아니랄까 봐 참 자세히도 조사해 왔네. 알았어, 기다리자.
그렇게 1시간이 더 흐르고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속도가 너무 빨라 물건이 날아갈 수 있다 하여 아들과 난 안경을 벗어 보관함에 두었다. '안경이 없으니 경치도 제대로 못 보겠네'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과 함께...
사실 난,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아들을 꼭 지켜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탔다.
그러나 막상 열차가 출발하니 아들은커녕, 내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와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특히 77도의 낙하지점에서는 심장이 소멸되는 느낌이었고, 그때부터 '엄마!!!' 소리를 100번은 내지른 것 같다. 겨우 고개를 돌려 아들을 바라보니 움직임 하나 없이 안전봉에 두 손을 꽉 쥔 채 소리도 못 지르고 있다.
순간 아들이 기절한 건 아닐까 걱정됐지만, 또다시 이어지는 낙하에 '3분이 이렇게 길었나. 제발 빨리 끝나라' 간절한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악동뮤지션의 '낙하' 노래가 생각났다.
말했잖아 언젠가 이런 날이 온다면,
난 널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죄다 낭떠러지야 봐,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아플지도 모르지만
내 손을 잡으면 하늘을 나는 정도,
그 이상도 느낄 수 있을 거야
눈 딱 감고 낙하- 하-
믿어 날 눈 딱 감고 낙하-우우
눈 딱 감고 낙하- 하-
믿어 날 눈 딱 감고 낙하-우우
밤하늘의 별이 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셋 하면 뛰어 낙하- 하-
핫 둘셋 숨 딱 참고 낙하
드디어 열차가 멈추고, 그제야 고개를 든 아들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 엄마, 엄마 얼굴이 왜 이렇게 하얗게 질렸어?
- 응. 너도 만만치 않아, 근데 너 괜찮아?
- 나 천국을 본 것 같아. 정말 너무 무서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어. 그리고 무중력이 뭔지 느꼈어.
- 엄마도 그래... 우리가 이걸 왜 탔을까?
아들이 천국을 봤다 하니, 정말 밤하늘의 별이 되는 기분이었나 보다. 우린 뒤도 안 돌아보고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남편과 딸을 만나 3시가 다 돼서야 오늘의 첫끼를 먹었다. 티익스프레스 3분간의 공포를 이야기하며...
점심을 먹은 후, 그나마 줄이 짧은 바이킹을 타러 갔는데 아들은 티익스프레스의 낙하를 체험 후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다. 바이킹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순간엔 기겁을 했고, 결국 중도에 벨을 눌러 하차를 했다.
그리고 낙하하는 놀이기구만 바라봐도 못 보겠다며 빠르게 지나쳤다.
- 엄마, 나 이제 놀이기구 못 탈 것 같아. 바라보기만 해도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 너 티익스프레스 때문에 놀이기구 트라우마 생긴 것 같아. 그래도 넌 에버랜드를 정복한 거야 제일 무서운 걸 탔으니까!!!
- 그럼 나 이제부터 놀이기구 아무것도 못 타나? 그럼 오늘 너무 아쉬운데...
- 엄마 생각엔 떨어지는 놀이기구만 안 타면 될 것 같아, 아마존 익스프레스는 긴장감 없이 재밌어~ 그거 타러 갈까?
- 응, 그건 재밌겠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아마존 익스프레스를 타러 갔고, 이것도 1시간 만에 탈 수 있었다. 아들은 이제야 웃으며 놀이기구를 즐겼다.
- 엄마, 나 에버랜드에서 이게 제일 재밌는 것 같아.
- 그래, 유유자적 둥둥 떠다니며 즐겁게 물을 맞으니 엄마도 이게 제일 재밌다.
- 엄마, 에버랜드는 환상의 나라가 아니라
'환장의 나라'야.
줄 서는데 환장하고, 떨어지는데 환장하고..
- 그러네. 우리 당분간 에버랜드에 오지 말자, 오더라도 사파리 구경하고 아마존익스프레스나 타러 오자.
그 이후로 우리 가족은 놀이기구보다는 퍼레이드를, 동물을, 풍경을 즐겼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차가 막히지 않아 고속도로에서 규정속도로 빠르게 달렸는데,
그 순간 아들과 나는 티익스프레스의 공포를 또 한 번 느끼고, 동시에 외쳤다.
아빠, 천천히 가!!!
빠른 속도에도 티익스프레스의 공포가 생각나다니, 정말 지긋지긋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목통증과 함께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티익스프레스를 타면서 극도의 긴장감으로 인해 온몸에 근육통이 온 것이다.
아들과 다시 한번 다짐했다.
앞으로 우리 티익스프레스 같은 롤러코스터는 절대로 타지 말자.
추석연휴 내내 에버랜드 모바일앱으로 놀이기구 대기시간을 봤더니, 우리가 갔던 날보다 대기가 더 길었다.
눈치게임은 없다. 에버랜드는 그냥 언제나 사람이 많다.
오늘의 교훈.
아이가 타보고 싶다고 졸라도, 티익스프레스는 절대로 타지 마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