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주간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한동안 자의식에 빠져 우울한 날을 보냈다. 나의 모든 상황들의 이유를 나에게서 찾으며 자존감 낮은 나의 모습, 무엇이든 쉽게 결정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나의 모습, 타인을 배려하다 결국 나를 돌보지 못한 나의 모습, 욕심도 삶의 목표도 없이 사는 나의 모습 등. 한 없이 연약한 나의 모든 모습들이 싫어지는 요즘이었다. 이렇게 나를 비판하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어린 시절에 멈춰 섰다.
유년기의 슬픔은 엄마가 없었던 것이었고,
청소년기의 슬픔은 술을 자주마시던 아빠였다.
안정적인 정서를 갖지 못했던 이런 어린 시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비판의 대상은 곧 친정아빠에게로 옮겨갔고 피해의식으로 번져갔다. 아빠는 항상 욕심이 없었다. 가정을 어떻게든 책임지고 내 가족을 더 좋은 환경에서 돌봐야겠다는 여느 가장들과 달리, 아빠는 목표의식이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싫으면 그만이었고, 내가 할 수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가난해도 발전할 생각을 하지 않으며 그저 현재에 자족하며 사는 인생이었다. 그래서 이기적이었고, 그것이 가족들을 힘들게 했다.
아빠가 그런 삶을 사는 동안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엄마는 밖에선 자존심이 강한 척했지만, 집에서는 자존감 낮은 연약한 엄마였다. 나는 그런 엄마를 위로하는 딸이 되어야 했고, 나를 희생하며 어린 동생들을 돌보는 엄마같은 누나가 되어야 했고, 가정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살림밑천 장녀가 되어야 했다.
나보다는 가족을 생각하는 이런 모습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부모의 모습을 보며 답습하는 것이 자녀이기에 내 안에 자존감 낮은 엄마의 모습이 있고, 욕심 없고 목표의식이 뚜렷이 없는 아빠의 모습이 있다. 이런 내 모습이 싫어 누군가를 탓하고 싶은 심정이었을까. 사춘기가 온 아이처럼 우리 집에 잠시 들렀던 아빠에게 나의 감정을 쏟아부었다.
아빠는 이런 나를 당황해하면서도 그 시절을 한 없이 미안해했다. 지금의 아빠는 과거와 다르다. 무엇보다 엄마가 인정한 새 사람이 되었고, 나이가 드니 건강도 마음도 약해지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과거의 아빠를 탓하며, 나를 부정했다. 이미 지나간 것임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억누르고 억눌렀던 원망과 그동안의 앙금이 터져 나왔다. 한바탕 쏟아냈음에도 후련함이 아닌 더 힘든 감정만 남았다. 한없이 미안해하는 아빠의 모습이 안타까웠고, 원망을 듣고 집 밖을 나서는 아빠의 작아진 모습을 보니 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저 위에 사진 같은 아빠의 모습을 원했는지 모른다. 아이를 안고 있는 아빠의 모습. 왠지 아빠도 아이도 바다를 보며 미소 짓고 있을 것 같은 평화로운 모습. 이런 모습을 원했지만 그렇지 못한 나의 어린시절로 인해, 어른이 된 딸은 이제서야 사춘기가 왔다.
과거 어린 시절 상처에 갇혀있는 나, 이제 아빠는 변했음에도 아직까지 변하지 않은 건 아빠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