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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이라고 불립니다 Oct 09. 2021

독일의 가을, 호박 이야기

호박을 좋아하는 여자(?)

어릴 적, 외할머니의 손칼국수 가게의 호박 만두는 시그니처 메뉴였다. 돼지고기와 호박, 부추와 파만으로 속을 채운 맛깔스러운 손만두. 먹어본 누구나 좋아하는 맛이었다.

그런데, 어릴 때의 나는 호박을 안 먹었다. 그래서 다들 맛있다던 그 만두를 어렸을 때는 먹어본 적이 없다.

지금도 엄마는 "얘는 어릴 때 호박을 안 먹었잖아. 먹으면 호박처럼 못 생겨진다고." 하고 호박을 먹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곤 한다.

설마, 정말 그렇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먹기 싫어서 내두른 변명이었겠지.

어릴 적에는 정말 호박이 맛이 없었다.

지금은 종종 만들어먹기도 하는 호박 만두

(할머니가 만들어주셨을 때 편하게 많이 먹었어야지,  지금은 내가 내 힘들여 해 먹어야 한다)


조리된 야채를 싫어하는 큰아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호박전을 해달라고 했다. 야채는 오이 토마토 당근 등을 생으로만 먹는 걸 좋아하는데, 호박전은 맛있단다. 계란 알레르기가 있어서 계란으로 못 부치고 부침가루나 간 한 밀가루로 부쳐낸다.

야채를 먹고 싶다고 하는 게 반가워 호박전을 종종 부쳐준다


 "융, 호박 가져갈래? 오늘 호박씨 긁어내서 말렸다가 내년에 심는 실험 하느라 호박이 이렇게 남았어."

초등학교 교사인 미란다가 점심시간에 호박이 종류별로 담긴 통을 가져와 내게 내밀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의 '씨' 실험을 위해 호박이 남는 기이한 일이 생겼다. 귀찮은 씨 긁어낼 필요 없는 손질된 호박이 반가워 얼른 받아들었다.

재작년이던가, 미란다의 정원에서 호박이 너무 많이 났다고 학교로 들고 와 나눠준 적이 있었는데 내가 너무 좋아했나 보다. 아주 큰 호박을 3개나 들고 왔는데, 그중 2개를 내가 가져갔더랬다. 호박전, 호박죽, 호박 튀김 등등을 해서 친구들과 실컷 나눠 먹었었다.

작년에는, 미햐엘이 정원에서 호박이 너무 많이 났다고 학교에 가져왔는데(독일 정원에서 주로 풍년인 것이 호박인가 보다. 늘 호박인 걸 보면) 선생님들에게 나눠주고도 남아서, 미란다가 나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했나 보다. 나보고 갖다 줄까? 하길래 좋다고 했더니, 진짜 큰 호박을 2개나 갖다 주면서 담에 또 갖다 준다고 했다. 너무 많아서 매일 호박만 먹는 게 너무 질린다며.

이렇게 나는 이제 호박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미햐엘이 준 호박

이번에 또 미란다가 호박을 주길래, "너희 정원에서 난 거야" 했더니 "아니, 리들(슈퍼마켓)에서 난 거야." 한다.

그렇지. 호박이 철이니 슈퍼에도 나왔겠구나.

그리고 전단지를 찾아보니, 30프로 세일 기간이었다.

동그라미 친 호박이 이번에 내가 미란다에게서 받은 호박이다. 평소에 먹어보던 호박은 왼쪽의 버터 호박이랑

가장 아래쪽의 홋카이도. 둘 다 단맛이 있다. 버터 호박은 이름 그대로 묵직한 고소함이 있다. 독일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 가을에 호박 철이 되면 버터 호박을 그냥 썰어서 볶아서 샐러드 위에 얹어서 '호박샐러드'로 메뉴를 내곤 했다.

홋카이도는 그래도 가장 한국 호박맛이 나는 종류다. 호박죽을 할 때도 주로 사용을 했다.

이번에 준 호박 중에 못 보던 단호박 닮은 호박이 있었다.

앗, 단호박인가? 한국에서 단호박을 못 먹고 왔는데... 먹을 게 너무 많아서 호박까지 손이 안 간다.

독일 와서 생각나서 아쉬웠는데...

드디어 독일 슈퍼에 단호박이? 하며 기대 기대

 

쪄먹기만 해도 맛있는 단호박이 있으면, 호박고구마 고구마가 없는 독일의 가을이 조금은 위로가 될 일이다.

단호박은 튀겨먹으려고 좀 남기고 다 찌고 삶았다.

맛 본 결과!

단호박 모양의 호박은 단호박은 아니었다는 사실. 아쉽다.

그래서, 그냥 튀김. 튀겨서 간장 찍어서 먹으면 어쨌든 맛있으니까. ㅎ 그래도 이 호박은 튀기니 맛이 더 좋긴 했다.

푹푹 찌고 삶은 호박들은

 

호박죽으로~

다들 그래도 단맛이 좋아서 호박죽도 맛있었다.

10월 31일이 할로윈이다 보니, 10월 중에는 슈퍼에서 호박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할로윈이 끝나고 난 직후, 호박이 가장 저렴해진다. 여기저기서 세일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장식용으로만 파는 호박도 있으니,

Speisekürbis(먹는 호박)을 확인해야 한다.

사실 장식용 호박은 누가 봐도 작고 특이하고 귀엽게 생겨서,

장식용일 거라고 추측은 된다.  

장식용 호박들

출근길에 보니, 낙엽이 지기 시작하는 가을이다.

길가의 너도밤나무도 밤들을 떨어뜨리기 시작해,  지나갈 때 맞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호박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학교 냉장고에 호박 한 상자가 있다는 생각이 난다.

지난주에 안티 파스티를 할 거라던 파견 왔던 안나가, 하고 본사로 복귀했다.

이번 주에 호박으로 만들 메뉴를 내놓아야겠다.

음, 호박전?

학교에서 처음으로 호박전에 도전해볼까?

100명이 넘는 아이들을 위한 호박전은 분명히 번거로운, 오롯이 '내' 일이 될 테지만, 그래도 나는 하겠지.

누가 하라고 시킨 것도, 내가 한다고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한국식인 음식을 하려고 하려고 한다.

이러고 보면 나는 참 한국 요리에 진심인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 한국 요리를 조금씩 독일에 알리며  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왕이면 잘 알리자! 마음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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