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200개의 메일
지난여름 허니문을 마치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 출근시간까지 버티기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는 마음으로 노트북을 열었다.
2주 동안 쌓인 200여 개의 메일을 하나하나 살펴보다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200여 개의 메일 중 팀장이 보낸 대부분의 메일은 '행대리가 안 하고 갔나 보다', '행대리가 잘못했다', '행대리 때문이다'라며 타인에게 나의 탓을 했고 나는 참조로 걸려있었다.
그리고 팀장은 출근하자마자 또 한 번 모든 팀원들에게 공개적으로 나에게 무안을 주는 전체 메일을 발송했다.
그 날 새벽에 잠을 잘 수 없었던 이유는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신혼여행 중에도 나는 업무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고 핸드폰에 깔려있는 그룹웨어와 사내 메신저 어플을 누르고 싶었지만 지금은 신랑과의 시간이라는 생각에 꾹 참기로 했다.
하지만 인내심은 오래가지 못했고 이틀차 저녁, 결국 뉴욕의 한 버스정류장에서 그룹웨어를 열었다.
그리고 팀장과 모대리가 나를 참조로 걸고 주고받은 쪽지를 보고 만 것이다.
"모대리, 행대리가 대행사랑 소통을 제대로 안 했나 봐요? 그리고 모대리에게도 휴가 중 업무대리 요청을 제대로 하지 않은 모양이니 대행사에 다시 연락해 주세요"
"팀장님, 행대리님이 휴가 직전 대행사와 소통하고 가셨고 저도 업무대리 인계받고 다시 한번 대행사와 소통하였습니다만 아직 회신이 오지 않았습니다. 대행사에 다시 리마인드 하겠습니다."
사실 나에 대한 팀장의 이런 대접은 자주 겪는 일이었다.
언젠가부터 팀장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신뢰하지 못하도록 갖은 애를 썼다.
팀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나를 함부로 대하기 시작했고 회사 안팎으로 나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내가 하지 않은 일들을 내 탓으로 돌리는 일도 부지기수였고 심지어 회식 장소에서 메뉴를 누락시킨 웨이터의 실수도 나의 탓이 되었다.
분위기를 눈치챈 팀원들은 슬쩍슬쩍 나를 도와주고자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녀(혹은 그)의 공포정치는 수년간 반복되어 온 행태로 내가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만 해도 3명의 팀원이 '무능한 인간'대접을 받다가 회사를 떠났다.
한 사람이 나가면 바로 다음 사람이 타깃이 되었고 여러 사람이 떠난 이후에도 항상 다음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어땠는가
나는 '나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과 거만하게도 '그 사람들이 문제가 있기 때문에 팀장님이 답답해서 저러는 거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제는 나의 일이 되어버렸다.
한 때는 내가 부족해서 나를 탓하는 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를 감정적으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답답하고 안 풀려서 조급한 마음에 가까이 있던 나에게 자기도 모르게 나쁜 말을 한 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순진한 마음으로 6개월 전, 나에게 전화해 수십분간 폭언을 해댄 팀장에게 나는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고 멈추지 않는 그녀(혹은 그)의 폭주에 참을 새도 없이 설움이 북받쳐 눈물이 뿜어져 나왔다. 숨길 수 없던 울음소리에 그녀(혹은 그)는 황급히 전화를 끊었고 1시간 뒤 '내일 아침 면담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다음날 아침, 팀장은 본인의 다이어리에 빼곡하게 본인이 나에게 그동안 쌓였다는 불만들을 적어왔다. 허망한 기분에 또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지만 그녀(혹은 그)는 우는 모습이 짜증 난다는 듯이 '너는 회사에서 감정조절을 못한다'는 평을 했다. 팀장과 함께한 3년의 시간 동안 처음보인 눈물 앞에 내놓은 반응이었다.
그녀(혹은 그)는 2시간 동안의 실컷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나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선심 쓰듯 말했다.
나는 눈물을 멈추고 정중히 요청했었지.
나에게 감정적인 비난을 하지 말아 달라고, 일에 대해 부정적 피드백을 말해주면 고치려 노력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리라고...
적잖이 당황한 팀장은 대충 얼버부리 더니 갑자기 횡설수설을 하고 또 앞서 두 시간이나 했던 연설을 빠르게 반복했다. 그리고 황급히 팀원들이 모여있다며 회의실로 나를 이끌었다.
"서프라이즈! 생일 축하합니다 행대리님!"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고 팀원들은 나 몰래 생일축하파티를 준비했던 것이다. 팀장은 마치 나를 파티장소로 유인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진심으로 내 생일을 축하하는 것처럼 굴었다.
나는 좀전 흘린 눈물 때문에 눈이 뻣뻣하고 건조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이후로 팀장은 나에게 다시 폭언을 하진 않았지만 타인에게 나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식으로 괴롭히는 수법을 바꿨다.
그렇게 또 6개월을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팀장이 나를 하대하니 같잖은 사람들도 자신이 그럴 권리라도 있는 양 나를 함부로 대했다. 우리 회사 사람이 아님에도 나에게 마치 자신이 선배라도 되는 양 잔소리를 해댔고 내가 보낸 메일을 자신이 확인하지 못하고 기한을 놓쳐버렸음에도 리마인드를 해주려던 나에게 대뜸 소리부터 지르며 화를 냈다. 증거를 보여주며 한참을 설명하니 무안해하던 꼴이란... 그렇지만 그 사람도 딱히 사과는 하지 않았다. 팀장처럼.
자리를 비웠던 2주간 한결같이 나를 비난해 온 팀장의 메일들을 보니 그동안 다치지 않기 위해 단단하게 지켜온 내 마음에 균열이 생겼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나는 모대리를 불러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리님 솔직히 말해주세요, 제가 팀 안에서 어떻게 보이세요?"
모대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 팀장님이 심하시다는 순간들이 있어요. 많이 힘드실 것 같았어요, 그동안."
마음의 균열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통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팀장이 나에게 모멸감을 주었던 순간들이 타인에게도 보였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이로써 그녀(혹은 그)가 틀렸고 내가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모대리의 시간을 더 빼앗을 수 없어 잠깐의 대화를 마치고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곧 사내 메신저에 모대리가 보낸 메시지 알림이 떴다.
'채증을 잘하셔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이 메시지는 작성자에 의해 곧 지워졌다.
모든 것이 명확해졌고 내 마음은 되돌릴 수 없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팀장과 나의 관계를 끝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