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호주 생활이 나에게 준 것들

by 미경

이렇게 그와 단 둘이서 보낸 수개월의 시간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나를 발전시켰다. 엄마를 떠나보낸 20살 이후, 지금까지 나의 삶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었다. 심지어 더 이상은 그렇게 투쟁적으로 살아갈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책임감과 죄책감을 내려놓지 못해 보이지 않는 적과 고군분투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연애했지만, 애인으로서 그들과 감정을 주고받기보다는 이 무서운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든 버텨내 살아남을 수 있게끔 일방적인 지지를 기대했다.


처음에는 흔쾌히 지지를 보내었던 이들도 계속해서 그런 일방적인 관계가 이어져나가자 지쳐 떨어지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경우 관계의 끝은 그들의 인내심이 바닥난 시점에 찾아왔다. 그렇게 반복되는 이별 속에서도 내 쪽에서의 문제점을 찾아 개선하는데 쓸 에너지는 여전히 없었고, 그다음 구원자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사실 나는 남자 친구보다는 그저 같이 살 사람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예고 없이 나를 훌쩍 떠난 아빠, 엄마와 달리 내 곁에 남아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내가 살아있을 만한 사람이란 걸, 아무것에도 잘 나지 않아도, 남보다 뛰어나지 않아도 그냥 이대로인 내가 존재함을 자주 확인시켜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다. 평소에 그런 사람이 내 곁에 있지 않다고 느끼니, 남자 친구가 생기면 내 요구를 전부 들어주고 관계의 중심이 나의 행복에 있기만을 바랐다.




호스텔에서 사람들과 함께 지낸 경험이 없었다면 C와의 관계 역시 이전과 같은 식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다. 비록 막바지에는 친구들과의 잦은 이별에 힘들어졌지만 호스텔에서의 지난 일 년은 전부 나를 크게 성장시켰고, 가장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은 호스텔 환경이 필연적으로 가지는 다양성이었다.


한국에서의 삶이 힘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던 정신병을 앓는 엄마, 적절한 교육 기회를 갖지 못해 육체노동을 하는 아빠와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위생적으로 좋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며 동정의 시선을 늘 감내해야 했던 나는, 인생의 가장 첫 단계부터 남들과 다르면 다르게 대접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변호사가 되었던 것은, 그 정도의 직업만이 이제는 심지어 부모조차 모두 잃은 나의 한참이나 부족한 부분을 상쇄시키고 남들이 인정하는 정상의 기준에 올려놓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렇게 정상성을 찾기 위해 싸워왔던 나였기에, 남들이 보았을 때 조금이라도 이상할 수 있는 행동은 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나의 말과 행동을 통제해 왔다.


예를 들어, 여자로서 정숙하지 못하게 남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려 하거나, 심지어 직접적으로 여러 남자들에게 드러내놓고 관심을 표하는 행위는 특히 80년대 후반에 나고 자란 나에게는 절대 허용되지 않는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나는 호스텔에서 수많은 그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물론 그 친구들이 나보다 열 살은 어리므로 세대의 차이도 있었겠지만, 영국, 독일, 스페인, 대만, 일본 등 국적을 불문하고 정말 많은 여자 친구들이 누가 봐도 외모적으로 잘 생기거나 개인적으로 호감이 느껴지는 남자들에게 말을 먼저 걸고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도한다거나, 자신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명확하게 노력하고, 그 남자에게 특별한 반응이 오지 않거나 그 남자가 떠나면 크게 개의치 않고 다른 상대를 골라 또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젊은 사람들이 모인 특수한 공간인 호스텔 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한편, 그 다양성 덕분에 한국에서만 살았다면 절대 생각할 수 없을 굉장히 흥미로운 궁금증이 담긴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남미 지역 페루에서 온 친구가 나에게 '한국에는 원래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라고 물었다. 페루를 비롯한 콜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등 남미 지역은 원래 오래전부터 그곳에 살던 원주민이 있었는데 스페인들이 침략해 정복지로 삼고 건너가 시작하다가 점차 다른 유럽인들이 이주해 가서 지금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남미뿐 아니라 미대륙 전역에 통하는 이야기이니, 페루 친구에게 있어서는 어느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민족의 구성이 시간에 따라 바뀌는 것이 '정상'이었던 것이다.


호스텔에 살던 전 세계인의 공용어는 당연히 영어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영어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2008년도 가장 처음 호주를 방문했을 때부터 내가 영어를 잘하지 못해 사람들과 잘 소통할 수 없는 부분에 굉장한 불편을 느껴왔고,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 실력이 조금 나아진 걸 느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한국 사회에서 영어는 가장 중요한 교과목 중 하나인 데다, 영어 실력은 곧 그 사람이 얼마나 교육을 받았고 어느 정도로 좋은 직업을 갖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틀로 쓰이기 때문에, 대개의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영어가 원어민에 비견될 만큼 유창하지 않은 이상 영어로 소통하기를 매우 꺼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호스텔에 살던 대다수의 친구들은 얼마가 됐던 자기가 알고 있는 단어와 문장 내에서 전혀 주저함이나 부끄러움 없이 늘 당당하게 하고 싶은 말을 했고, 오히려 그 사람과 대화하고 있는 영국인 같은 원어민이 찰떡같이 알아듣고 반응하거나,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더 쉬운 형태로 말을 바꿔 질문을 하거나 하는 노력을 했다.




이런 일련의 경험들은 오랜 기간 한국에서 살아오면서 '이런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만 해'라고 깊게 자리 내린 나의 상식을 부수었고, 더 많은 것들을 포용하는 방식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하게 했다. 이는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 관대해지는 기회를 부여했는데, 특히 대화의 주제를 선택할 때 그러했다. 호스텔에 모인 우리에게는 그 모습이 어떠했을지언정 각자의 국가에서 살던 삶을 잠시 멈추고 호주로 여행을 떠나올 만큼 각자의 사연이 있기 마련인데, 다들 그러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서슴지 않아 했고 나 역시 자유롭게 나에게 있었던 슬프고 힘든 이야기들을 내어놓고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정말 힘들었겠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나 말고 다른 데 가서 하지 마, 사람들이 안 좋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라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었다. 이것은 위로는커녕, 내 인생 이야기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수 있고, 그런 일들을 겪어왔다는 사실 만으로 사람들이 나를 좋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경고가 된다. 하지만 호주에서는 그 누구도 나의 이야기를 듣고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정말 힘들었겠다. 나한테는 이런 일이 있어서 공감이 되네'라는 식으로 위로와 포용을 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안 지 얼마 안 된 이 친구들에게 죽을 만큼 힘들었던 내 과거 이야기를 해도 된다고 나 스스로에게 관대해지자 이번에는 그들의 삶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고,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이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모습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한국에서 자라며 견고하게 자리 잡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점점 더 느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옷차림, 말투, 행동, 생각에서 정상의 기준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워질 수 있었으며, 내가 자유로워질수록 더 많은 사람, 기회, 아이디어가 찾아왔다. 전 세계에서 온 친한 친구들이 생기고,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이야기하고, 웃고 즐기는 동안 지금 이대로의 나도 괜찮다는 믿음이 자라났다.




이러한 믿음이 내 경험을 통해 내 안에서 쌓이는 것을 경험한 뒤 C를 만나자 이제는 내 안에 상대방을 포용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공간이 생겼다는 게 느껴졌고, 그런 공간을 이용해 C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가고 그의 지난날과 상처를 보듬어가며 서로 주고받는 마음이 가능해졌다.


아직은 C와의 만남도, 호주 생활도, 또 다른 새로운 경험을 할 나의 삶도 모두 진행 중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알 수 없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 받아들이고 이 삶을 살아나가야겠지만, 최소한 나는 16년 만에 찾은 호주에서, 그 첫 방문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것을 배우고 큰 위로를 받는 중이라고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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