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에 담긴 한 가족의 이야기
사각 사각
종이와 흑연의 기분 좋은 마찰 소리. 마지막으로 들어본 게 언제인지 생각나세요?
1990년대만 해도 많은 이들의 일상에 함께했던 연필. 그러나 이제는 찾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드뭅니다. 이 때문에 사업 아이템으로 봤을 땐 가치가 '0'에 가깝죠. 제품 단가도 낮아 인건비나 설비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하면 만드는 게 손해일 정도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대전 한켠에서 고집스럽게 연필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940년대에 설립된 동아연필이죠. 지금은 필기구 매출 대부분이 펜에서 나오지만 연필을, 그것도 국내 생산을 멈추지 않고 있는 동아연필의 속 이야기입니다.
참혹했던 해방 후
동아연필의 이야기는 1946년, 미군정 시기에 시작됩니다. 중국 상해 등지에서 백범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진성 김노원은 고향인 대전에 돌아온 뒤 피폐해진 우리나라의 현실에 좌절했죠. 이에 국가 재건을 위한 교육재단 설립이라는 꿈을 가슴에 품습니다.
김노원은 해방을 맞아 일본에서 돌아온 아들 우송 김정우와 사업에 뛰어들게 됩니다. 이 회사가 바로 동아연필입니다. 대부분 일본산 수입에 의지했던 필기구를 국산화해 산업적 독립을 이루는 것은 물론, 교육재단 설립의 꿈도 이룰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이었던 셈이죠.
한 사람의 꿈에서 시작된 동아연필. 실제로 설립 10년 뒤인 1954년에는 학교법인 동아학원을 세웁니다. 우송대학교와 우송고등학교 등이 속한 현 우송학원의 전신입니다.
제조업의 생명, 기술과 품질
동아연필은 한국을 대표하는 문구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국내 필기구 점유율이 70%에 달했죠. 그러나 컴퓨터의 개발과 보급 등으로 더 이상 필기구를 쓰지 않게 됐고 사업은 힘들어졌습니다. 학령인구가 급속히 줄면서 문구 시장 자체가 침체되기도 했죠.
이 같은 위기의 순간마다 품질에 매달리며 내공을 키웠습니다. 그 결과 1998년 향기 중성펜으로 중성펜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고, 2000년대 초반에는 일본 파일로트 등 일부 기업만 가진 0.3mm의 볼펜 볼을 국내 최초로 개발했습니다. 심을 거꾸로 세워도 잉크가 흘러내리지 않는 역류방지 기술 등은 세계 문구 시장에서도 인정받는 기술입니다.
이렇게 개발한 특허 기술만 60여 개.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동아연필은 해외 시장에서도 종횡무진하고 있습니다. 전체 매출의 65%가량은 해외에서 올리고 있죠.
70년 넘게 지켜온 진심
한국에서 제조업을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경영 활동의 고정비로 꼽히는 인건비 때문이죠. 이 때문에 많은 제조업 회사들이 본사는 한국에 남기더라도 생산 공장은 인건비가 낮은 동남아 지역으로 이전시켰습니다.
문구회사들도 예외는 아녔습니다. 노동력이 저렴한 태국과 베트남 등지로 공장을 옮겼죠. 그러나 동아연필은 4대째 대전을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필기구 업체 중 유일하게 국내 생산을 고집하고 있죠. 소비가 극소수인 연필의 경우 국내에서 만들면 비용이 남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민족의 발전과 번영'이라는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진심입니다.
낭만적인 기록의 도구
“앞으로 필기구 시장이 줄어들 수는 있지만 손으로 도구를 움직이는 인간의 본능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_김학재 동아연필 대표
이제 연필은 수집의 대상이 될 정도로 유니크한 아이템이 됐습니다. 사진과 동영상, 타이핑 등 더 쉽고 편한 기록 방법들이 보편화됐기 때문이죠.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연필이 갖는 의미는 더 짙어지고 있습니다. ‘손편지’가 낭만과 진심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이유죠. 느리더라도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진심에는 조금 더 특별한 정성이 담겼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연필의 가치는 시장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카카오메이커스가 국내 헤리티지 브랜드 발굴을 위해 동아연필과 함께 콜라보해 만든 '웨이크업 펜슬'은 별다른 마케팅 없이도 약 4000세트 판매됐습니다. 자루로는 2만3000개가 넘죠. 연필 고유의 사각거리는 느낌, 플라스틱과는 다른 나무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는 후기와 함께 만족도도 94%에 달했습니다.
손을 움직여 사랑하는 사람에게 글을 써 본 지가 언젠가요? 사각거리는 연필의 기분 좋은 필기감을 느껴본 지 오래되지 않았나요? 이번 주말엔 다시 연필을 들어보는 게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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