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흔들린다는 것은 뿌리 깊이 내렸다는 증명이다

중용은 도착지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이다

by 끄덕이다

함께 배울 수는 있어도 함께 도로 나아갈 수는 없고, 함께 도에 나아갈 수는 있어도 함께 설 수는 없으며, 함께 설 수는 있어도 함께 권도를 행할 수는 없다. – 『다산의 마지막 질문』 중



요즘 시대에 누군가 "배울 기회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핑계처럼 들릴 것이다. 스마트폰 하나면 지구 반대편의 석학이 쓴 글을 찾아 실시간으로 읽을 수 있고, 심지어 관련 내용을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마저도 이제는 AI가 등장하여 검색 절차마저 옛 유산으로 취급받는 시대가 도래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정보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문제가 되는 건 정보의 결핍이 아니라 과잉에 따른 것이다. 즉, 정보의 부재가 아니라 소음의 홍수에 기인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정보의 양이나 질 그 자체를 논하지는 않으려 한다. 대신 조금 시선을 돌려 다른 부분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일단 정보의 홍수 속에서 소음을 걷어내고 양질의 지식을 얻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같은 곳에 도착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람마다 같은 책을 읽어도 밑줄 긋는 문장이 다르고, 같은 강의를 들어도 깨달음의 깊이가 다르며, 또한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공자가 "함께 배울 수는 있어도, 함께 도(道)로 나아가긴 어렵다"라고 한탄한 것이리라.


여기서 말하는 도(道)는 인생의 방향이자 신념이다. 하지만 방향을 잡았다고 해서 곧바로 흔들리지 않는 뜻을 세우는(立) 단계에 이르지는 못한다. 더욱이 뜻을 세웠다고 해서, 상황에 맞게 이치에 맞는 행동을 하는 능력, 즉 권도(權道)의 경지에 다다르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 지점에서 유학의 가장 난해하고도 매력적인 개념인 '중용(中庸)'이 등장한다.


흔히 중용을 오로지 중립의 편에 서서 중도의 길을 걷는 것으로 오해하곤 한다. 하지만 중용은 그러한 기계적인 중간이 아니다. 중용이란 언제나 자신만의 기준을 지키되,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곧은 척추를 가지되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굽힐 줄 아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원칙이라는 단단한 뼈대 위에 유연한 근육이 붙어야 비로소 삶이 건강하게 움직이듯 말이다.




말은 쉽지만, 실천은 지독히 어렵다. 특히 "내 생각이 옳다"는 확신이 강한 사람일수록 중용에서 멀어지기 쉽다. 원칙을 지키려는 마음은 숭고하지만, 맥락을 읽지 못한 신념은 종종 아집이 되어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미생과 백희의 죽음이 그렇다. 홍수가 밀려오는데도 약속을 지키겠다며 다리 기둥을 끌어안고 죽은 미생, 궁전에 불이 났음에도 예법에 맞는 호위가 없다는 이유로 탈출을 거부하고 불길 속에 남은 백희. 누군가는 이를 충직하다 칭송할지 모르나, 중용의 눈으로 보면 이는 '어리석은 고집'일 뿐이다.


진정한 신념은 죽음으로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 삶 속에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살아야 약속을 지키고, 살아야 도리도 다할 수 있지 않겠는가. 원칙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도리어 사람을 옥죄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함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미생이 되거나, 혹은 기회주의자가 되라고 강요하는 듯하다. 원칙 없이 상황에 휩쓸려 떠밀리거나, 반대로 자기만의 고집에 갇혀 세상과 스스로 단절되거나. 역사는 늘 이 두 극단 사이에서 비틀거렸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어느덧 사회 초년생의 티를 벗고 그 중간을 넘어가는 길목에서 '뜻을 세워 산다'는 것이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 뼈저리게 실감하는 중이다. 중용의 거창한 도리는 고사하고, 당장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자주 멈칫거린다.


지난 몇 년간은 유독 외풍이 거셌다. 믿었던 관계의 변화, 나를 둘러싼 환경의 압박, 예고 없이 들이닥친 감정의 쓰나미들. 그때마다 나는 고집스런 선비처럼 기둥을 붙잡고 버티다 물을 먹기도 했고, 때론 휩쓸려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제자리를 하염없이 맴돌기도 했다.

그렇게 폭풍 같은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이제 아주 조금, 길이 보이는 듯하다. 바람은 여전히 생살을 베듯 불지만, 무작정 몸으로 때우며 버티던 시절과는 달라졌다. 어쩌면 지금 내가 겪는 이 혼란과 시행착오가, 중용을 배우는 가장 확실한 수업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중용은 어느 날 큰 깨달음으로 완성되는 결과물이 아니다. 매 순간, 흔들리는 와중에도 중심을 잡으려 애쓰는 과정,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한 번의 영웅적인 결단이 아니라, 수천 번의 사소한 선택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태도다.


앞으로도 어쩌면 나는 수없이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흔들린다는 것은 뿌리가 뽑혔다는 뜻이 아니라, 바람에 적응하며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증명임을. 그렇게 나는 나만의 도를 찾고, 뜻을 세우며, 때에 맞게 유연히 대처하는 법을 천천히 익혀가려 한다. 그것이 결국 가장 지혜롭고, 가장 나다운 삶으로 이어지는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