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내가 덜 흔들리면, 관계는 덜 부서진다

공자가 말하는 사람다움의 기술, '극기복례'

by 끄덕이다

안연이 인(仁)을 물으니 공자가 말했다.

"극기복례가 인이다. 하루만이라도 극기복례를 하면 천하가 인에 귀의할 것이다. 인을 실천하는 것이 자신에게 달린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달렸겠느냐?"

안연이 구체적인 실천 세목을 묻자 공자가 말했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행동하지 말아라."

안연이 말했다.

"제가 비록 총명하지 못하나 이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 『다산의 마지막 질문』 중



'극기복례(克己復禮)'. 이 단어를 검색하면 흔히 "자기 자신의 사욕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라 정의된다. 뜻은 명확하다. 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운동해라", "절제해라" 같은 말처럼 당위적이지만 일상에 적용하기는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이 윤리 교과서의 표어를 넘어 실생활에 녹아들 수 있도록 다시 읽어보고 싶었다. 글자를 하나씩 쪼개어 보면 그 뜻이 조금 더 따뜻하게 살아난다.


먼저 극기(克己)를 직역하면 '자기를 이기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는 단순히 의지가 박약한 나를 뜻하지 않는다. 공자가 초점을 맞춘 것은 훨씬 원초적인 영역이다. 순간적으로 치솟는 감정, 이익을 먼저 계산하는 본능, 억울함을 명분 삼아 정당화되는 공격성, 인정 욕구가 변질된 허영심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보통 이런 것을 '기질'이라 부르며 방치하곤 한다.


하지만 공자는 이러한 감정과 행동을 곧바로 '나'라고 믿어버리는 것 자체를 경계했다. 감정이 올라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문제는 그 감정이 즉시 '나'라는 주도권을 가져가 버릴 때다. 그래서 극기는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나를 되찾아 오는 과정이다. "이 감정이 나를 휘두르게 둘 것인가, 내가 나로서 오롯이 다시 붙잡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복례(復禮)는 '예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예(禮)'는 단순한 형식이나 예절만이 아니다. 공자에게 예는 관계의 질서를 세우는 기술이며,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최소한의 방식이다. 예는 이런 장면에서 드러난다. 내가 옳을 때조차 상대를 모욕하지 않는 말투, 이기고 싶을 때도 상대의 체면을 지켜주는 태도, 불리해도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자세, 타인을 도구로 쓰지 않겠다는 결심. 즉, 예는 "남을 배려하라"는 감상적인 구호를 넘어, 내 욕망이 관계를 파괴하지 않게 만드는 안전장치다.


그래서 '극기복례'는 이렇게 다시 적을 수 있다. "내 감정과 욕망이 나를 사로잡지 못하게 하고,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


공자는 이것을 인(仁)의 핵심이라 말했다. 여기서 인(仁)을 무엇이라 표현하면 좋을까. 원만한 대인관계나 상대에 대한 이해심일까. 아니면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일까. 모두 맞는 말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인은 그보다 더 단단하고 뜨겁다. 인은 결국 '사랑'에 가깝다. 감정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사랑이다. 좋을 때만 친절한 것이 아니라, 내가 조금 불편해도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손해를 보더라도 신뢰를 지키는 그 마음 말이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는 전쟁이 끊이지 않던 대혼란기였다. 세상이 망가질수록 사람들은 더 빨리 계산한다. 눈 앞에 이익이 먼저였고, 힘이 제 1의 덕목이며, 생존이 가장 우선시되는 시대였다. 그러한 시대에선 사람은 서로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게 된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공자가 인을 말한 것은 현실을 모르는 자기만의 세상에 갇힌 이상론자였던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현실이 너무도 잔혹했기에, 사람이라면 끝내 놓치지 말아야 할 마지막 끈을 붙든 것이다.




공자의 문장에는 단호함이 있다. "인을 실천하는 것이 자신에게 달린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달렸겠느냐?" 이 말은 어느 날엔 위로가 아니라 부담으로 다가온다. "결국 나만 참아야 한다는 말인가? 상대가 먼저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오해한 것이 있다. 공자는 우리에게 무조건 참으라고 한 게 아니다. "네가 참아라"가 아니라 "네가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세상은 바꾸기 어렵고, 타인 또한 내 마음대로 바꾸기 어렵다. 그러나 딱 하나, 바꿀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건 나의 태도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붙잡는 사람만이 바꿀 수 없는 것에 휘둘리지 않는다.


공자는 네 가지 실천 항목을 제시했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행동하지도 말라는 것. 옛날이야기 같지만 지금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현대의 우리는 예가 아닌 것을 너무 쉽게 보고, 너무 쉽게 듣고, 너무 가벼이 말한다. 자극적인 영상과 댓글을 무비판적으로 소비하고, 남의 실패를 가볍게 조롱하며, 사람간의 관계를 감정 쓰레기통처럼 쓰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내 마음이 거칠어졌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내뱉는 말이 날카로워지고, 참아낼 힘이 약해지며, 타인에 대한 신뢰는 메마른다. 우리가 공자의 가르침을 도덕적 훈계로 치부하지 않고 매일 매일의 식단처럼 마음에 새겨야 하는 이유다. 무엇을 보고, 듣고, 말하느냐가 결국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이 매일을 현인처럼 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공자의 문장에서 자그마한 희망을 엿본다. "하루만이라도 극기복례를 하면…". 공자는 평생이 아니라 '하루'를 말했다. 완벽한 성인이 되라는 독촉이 아니라, 하루의 방향을 바꾸라는 제안으로 들린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극기복례의 날'을 실험해 보는 건 어떨까. 한 달에 한 번, 혹은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좋다. 보고 싶은 자극적인 것들을 줄이고 마음이 맑아지는 것에 머문다. 듣고 싶은 말 대신 상대가 실제로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본다. 이기기 위한 말 대신 관계를 살리는 말을 고르고, 즉흥적인 감정 대신 한 박자 늦춘 행동을 선택해 보는 것이다.


그리하면 하루가 끝날 때쯤 우리는 어쩌면 발견할 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대로일지 몰라도, 나 자신은 이전보다 덜 흔들리고 있음을. 내가 덜 흔들린다면 관계도 덜 부서진다. 현인이 되지 못해도 괜찮다. 사람다운 마음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하루는 충분히 인간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