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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KEUFeeLMYLOVE Mar 18. 2024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지옥은 있다

누구나 감정적으로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경험이 있다. 삶의 초반기에 결정적인 사건을 경험하면 그때의 감정들은 겹겹이 쌓아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기도 한다. 마음속으로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면 또다시 그때로 돌아간 듯하다. 단지 생각만으로도. 이 같은 감정의 불응기를 너무 오랫동안 유지하면 어떤 사건에 대한 감정적 반응은 하나의 기질이 되고 마침내 성격적 특성으로 굳어진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이런 오래된 감정의 층을 감추고 피하면서 바쁘게 살아간다. 새로운 친구를 만들고, 낯선 곳을 여행하고, 열심히 일을 하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거나 새로운 운동을 시작한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취하게' 한다. 삶의 초기 사건들이 남겨놓은 감정의 상처들이 수많은 '현재 행동들의 동기'가 된다는 사실은 거의 깨닫지 못한다. 사람에 따라 다양하기는 하지만 이런 위기는 보통 삼십 대 중반쯤에 시작되곤 한다. 나는 그 위기가 조금 일찍 찾아왔었다.


"나는 누구인가?부터 시작해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 뭐였더라? 삶의 목적이 뭐야? 뭐가 날 행복하게 해? 사랑은 뭔가? 나는 나를 사랑하는가? 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 그동안 속에 파묻혀있던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내 질문에 꽉 막혀있을 때쯤, 15년 지기 친구와 오랜만에 전화 통화를 했다.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이어졌던 우리의 대화에서, 나는 왜 아직도 15년 전 '그 어린애' 같냐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나는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꼬마'처럼 느껴졌다. 근본적인 질문에 씨름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니 꼭 나만 뒤처지고 있는 것 같았다.


친구는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네주었다. 근육을 키우는데도 에이포 용지 쌓듯이 성장한다는 말 한마디였다. 내가 꼭 에이포 용지를 잘 쌓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저 잘하고 있다는 피상적인 위로보다 나에게는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단지 종이가 얇아서 내가 아직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라 들렸다. 나는 이 말 한마디로 또 몇 개월을 힘차게 살아갔다. 지금도 그러하다. 사실 그 친구가 어떠한 말을 해줬어도 위로가 되었을 것 같다. 그 사람이 좋으면 그가 하는 모든 말이 위로다.


친구의 그 한마디 덕분에 조바심 내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고, 나의 수많은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수많은 책들을 전전했다.



고맙게도 그 시절에 읽었던 책들은 다 나에게 위로와 해답을 가져다주었다. 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좋은 책을 읽으면 그 속에 어떠한 말이든 나의 영감을 툭하고 건드리는 문장이 있기 마련이다. 그 한 문장으로도 내 인생을 바꿔 놓기도 한다. 그러면서 '진짜 내가' 조금씩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좋은 책을 읽으면 자기 성찰을 통해 진짜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나갈 수 있고, 진짜 나의 내면의 느낌을 정면으로 마주할 기회 또한 누릴 수 있다. 게다가 책의 저자와도 대화를 하지만 가장 많은 대화를 하는 건 '나와의 대화'다.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나만의 답을 캐낸다. 그러다 보면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 가장 위로가 될 때도 있다.



이제야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내가 내 속에서 질문이 끊임없이 쏟아졌던 그 시절은, 나의 정신 에너지가 완전히 떨어진 시기였다는 것을. 정신 에너지가 떨어졌다고 완전히 탈진해 쓰러지는 건 아니라 한다. 질문이 늘어나는데, 머릿속이 질문으로 가득 차는 것은 감정의 회피 증상이다.


에너지가 바닥나면 무기력, 두려움, 억울함 등의 감정이 채워져서 괴롭다. 이때 자신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면 '호기심'이라는 '중립적인 감정'이 만들어진다. 뇌에 궁금증을 유발해 감정 중추보다는 이성 중추가 활동할 수 있도록 마음가짐을 변화시키는 자기 방어 증상이다. 그래서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는 '독서'나 공부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는 경우가 많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이렇게 생긴 호기심이 생산적인 활동으로 이어지는 좋은 예였던 것이다. 요 근래 나는 몇 년간 그 어느 때보다 독서에 열을 올렸다. 독서는 불이 난 것처럼 혼란스러운 마음에 물을 끼얹어주는 것 같다.




계속 과거에서 오는 짐만 계속 져 나른다면 그것은 언제라도 나의 발목을 붙들 수 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지옥이 있다는 문장이 이제는 좀 희미해지고 싶다. 희미해졌다. 지옥은 내가 만든 것이므로 언제든지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지옥을 생각하고 살아가기에 우리 인생이 너무 아깝다. 폰이 뜨거워질 정도 통화한 그 시기에 나는 에이포 용지를 한 스무 장쯤은 쌓았으려나.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한 문장으로 기억되려면 에이포 용지를 쬐금 더 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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