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달라붙는 옷만 입어야 해..?
드디어 필라테스 센터 문턱을 코 앞에 두고 있을 때, 딱 알맞은 핑곗거리를 찾았다.
1. 필라테스할 때 무슨 옷 입고 해야 해?
2. 레깅스 입어야 하는 거 아니야?
3. 필라테스 옷이 없는데?
☞ 결론: 옷 때문에 못 가겠다..!
필라테스를 해보기로 크게 마음먹었는데, 막상 가려고 하니 입고 갈 옷이 걱정되기 시작한다. 기껏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려 놓았던 마음은 조금씩 새어나가 이내 작아진다. 당연하다. 생전 필라테스가 처음인 사람은 개미 한 마리도 못 지나갈 것같이 쫙- 달라붙는 레깅스가 생소해 첫 진입이 어려울 수 있다.
그래도 주변 필라테스 선배들은 "Nope" 단호히, "괜찮아!" 한다. 전부 붙는 옷 입고 오고, 심지어는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이다. 사이다를 벌컥 들이켠 것 같은 답변을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하다. 운동하는데 다른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겠어..? 그렇지, 옷은 아무런 걸림돌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제가 첫 수업 때 선택한 옷은요.
위아래 모두 검은색
주로 등산할 때 입었던 붙는 티와 나이키 레깅스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치 그림자처럼 내가 안 보이길 바라는 마음이 반영된 게 분명하다.
똑같이 나와 첫 수업인 다른 수강생들의 옷은 어떨까? 두 명은 들어갈 수 있는 헐렁한 박스티를 입고 오는 사람도 있었고, 딱 붙는 레깅스대신에 편한 조거팬츠를 입고 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센터에는 4년 이상 오래 다닌 경력자들도 많아 레깅스와 크롭탑은 당연하고, 탱크탑도 흔했다. 오랜 센터라 신규회원을 비롯해 기존회원들도 많아 필라테스복이 정말 다양했다. 그 덕분인지 나의 무채색 검정 그림자 운동복에서 점점 색깔이 칠해졌다.
모든 회원들이 나처럼 검은색 옷만 입고 왔으면, 나도 줄곧 눈에 띄지 않는 검은색 옷만 입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아니 세상에, 하루는 나만 빼고 일제히 알록달록 밝은 옷을 입고 왔을 때가 있었다.
큰 거울이 정면으로 마주하는 수업 공간에서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위아래 검은색을 입은 내가 제일 튀었다. 차이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나의 몸 형태가 그림자처럼 가장 안보였고, 환한 옷을 입은 다른 회원들의 몸은 더욱 잘 보였다. 흉곽호흡을 하는데, 갈비뼈가 얼마나 튀어나왔는지 심지어 몇 센티인지까지도 확연히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훤히 보였다.
잘 보이는 만큼 강사님의 큐잉도 자연스레 "(밝은 옷 입은) OO님, 갈비뼈를 더 닫아주세요. 조금더요. 더더- 더- 이제 스톱-!" 하고 보다 디테일하게 지도가 가능했다. 그저 갈비뼈를 닫아주세요 에서 그치지 않고 갈비뼈를 얼마큼 닫아야 하는지 그 지점이 뾰족해지는 것이다. 정말 사소한 차이다. 이렇게 흙같이 작은 알맹이들이 모여 큰 산이 만들어진다.
내 갈비뼈는 검은 옷에 가려서 제대로 숨 쉬고 있는 건지, 너무 들려있지는 않은지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치 거울을 안 보고 화장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 그래서 그렇게들 딱 붙고 밝은 옷을 입는 건가?" 이유가 있구나! 하고 처음 살갗으로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밝은 탑 + 검은 레깅스
검은색 옷이 더 이상 그림자인 척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나도 환한 색으로 입어봐야겠다. 그래서 딱 붙는 회색상의로 바꿨다. 나름 상당한 발전이다. 하의는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인지 여전히 검은 레깅스다.
검은색에서 회색으로만 바꿔도 내 흉통이 잘 보였다. 회색상의가 가로로 저만치 쭉 늘어났다가 다시 가운데로 요만큼 모이는 게 눈에 확 보인다. 보고 있자니 그게 재밌어서 더욱 호흡에 집중할 수 있었다.
강사님의 티칭도 달라졌다. "날개뼈를 더 끌어내리세요!"
상의 색이 밝아지니 앞쪽의 갈비뼈는 물론이고, 뒤쪽 날개뼈 움직임도 훨씬 잘 보이는 것이다. 상의 색만 바꿔도 운동 성과가 달라질 수 있겠다는 걸 체감하기 시작했다.
밝은 크롭탑 + 나름 밝은 레깅스
현재는 배꼽을 겨우 가리는 기장의 딱 붙는 크롭탑을 가장 즐겨 입게 되었고, 팥죽색과 같은 내 기준 나름 밝은 레깅스도 입게 되었다. 나에게 맞는 옷을 입으니 그만큼 운동도 즐겁고, 효과도 달랐기 때문이다.
도대체 크롭탑이 운동 효과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싶었던 나였다. 팔을 드는 동작을 하면 이어서 옆구리가 까꿍하고 인사한다. 하루 중, 나의 배 중에서 그것도 옆구리 밑낯을 얼마나 많이 마주할까?
미디어에서 많이 노출이 되어 인기가 많은 사람을 상상해 본다. 익숙해지면 나도 모르게 호감이 간다. 처음 봤을 때는 되게 낯설게 생겼는데, 계속 보니깐 매력도 있는 것 같고, 귀엽고, 이제는 그걸 넘어선 잘생기고 이뻐 보인다.
내 옆구리도 마찬가지다. 자주 보고 익숙해지니 그만큼 호감이 가서 더 잘 챙겨주고 싶은 것이다. 자주 노출된 자극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이른바 옆구리 단순노출효과다. 가려서 낯설게 만들기보다는 에라 모르겠다 자주 봐서 호감을 증가시킨다.
나는 앞을 봐도, 뒤를 돌아봐도, 온통 거울로 둘러싸인 레슨룸에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던 적이 있다. 그래도 얼굴은 자주 마주했던 나지만, 내 몸 구석구석을 50분 동안 그렇게 집중해서 볼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내 얼굴과는 친했지만 나의 몸과는 친하지 않았나 보다. 데면데면했던 나의 몸과 낯가림이 끝나고 나니, 크롭탑이 올라가든지 말든지 오직 운동에 집중할 수 있었다.
매트 필라테스가 아닌 기구 필라테스라면 더욱이 벙벙한 옷보다는 딱 달라붙는 옷이 더 효과적이다.
근육의 움직임을 더 잘 파악할 뿐만 아니라, 간혹 기구에 옷이 끼일 수 있는 점, 옷이 쏟아져 무게감으로 인한 피로도를 미연에 방지해 주기도 한다. 또한 딱 붙는 레깅스는 하체 근육의 떨림을 조금이라도 잡아준다. 다음날 피로도가 훨씬 덜하다. 레깅스 탄성에 따라서도 근육통이 오래가거나 빨리 회복되거나 하는 차이가 있었다.
물론, 무조건 딱 붙고 밝은 옷이 필라테스 실력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검정 옷도 자신이 만족하고 즐긴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나의 경우에는 자리가 사람을 만들듯이 필라테스 옷도 마찬가지인듯하다. 내가 전문가처럼 보이는 옷을 입는다면 내 실력도 곧 그렇게 따라가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었고 나름 효과를 톡톡히 봤다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관계는 자기 몸과의 관계다. 이번 삶의 여행을 위해 영혼이 선택한 몸을 필라테스로 맘껏 사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