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규칙, 다른 서울 #14_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유준호
저는 시민청에서 시민력강화프로젝트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어요. 지금은 '부채질 연구소'라는 문화기획 사업체를 꾸려 1인 기획자로도 활동하고 있고, '청년정책네트워크'에서도 활동 중이죠. 소위 '프로N잡러'같은 개념으로 일하고 있는데, 제가 하는 일들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하나 있어요. 바로 '시민참여'죠.
시민청이라는 건 시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예요. 시민들이 뭔가 체험하고, 활동을 할 수 잇게 하는 하나의 장인 거죠. 그런데 시민들이 무작정, 이 공간에 들어온다고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가 널려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문화기획자로서의 제 일은 그 콘텐츠를 채우는 작업에서 시작됐어요. 그러다 보니 이후로도 시민참여, 거버넌스 같은 공익적 가치를 자연스럽게 추구하게 되더라고요.
시민, 문화를 통해 정치와 만나다
문화콘텐츠를 기획하고 사회에 세팅하려면 당연히 다양한 사람들의 취향을 고려해야 해요. 그러다 보면 결국 공익, 즉 공공영역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봐요. 취향이란 건 보통 어떤 개인의 삶의 형태, 그가 처한 상황, 처지 등에서 형성되기 마련이고, 거기에 영향을 주는 게 바로 공공영역의 일이니까요.
최근엔 청년들이 모여 토론하는 '청년주간 콘퍼런스'나 장애인 관련 문화체험을 기획했었는데요. 이런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선 당연히 청년이나 장애인 당사자들의 의제, 즉 '공공영역' 차원의 이슈를 고려해야 하죠.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고 또 무엇이 필요한지를 염두에 둬야 하니까요.
여기서 중요해지는 개념이 바로 '생활 의제'에요. 사실 '의제'라고 하면 보통 정치적인 이슈를 떠올리잖아요. 대중문화와는 거리가 있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많죠. 방금 말한 '청년주간' 같은 행사만 해도 그 주제에 관심 있는 분들의 경우 많이 참여하지만, 일반 대중들은 선을 긋기도 하죠. 좀 정치적인 행사 아니냐고, 나는 정치에 관심 없다고. 거기서 나오는 '의제'를 순수한 정치의 영역으로 넘겨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의제라는 건 사실 누구나 가지고 있고,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거든요. 꼭 정치적인 수준의 큰 의제가 아니라고 해도 자기 삶, 생활 속에서 등장하는 의제들이 있잖아요. 제가 하려는 게 바로 그것들을 발굴하는 일이에요.
누구나 자신만의 '의제'가 있다
좀 더 예를 들어볼까요? 최근엔 서울시와 서울시민청에서 업사이클링(재활용)을 주제로 한 시민참여워크숍을 기획해보자고 제안이 들어왔어요. 저는 그걸 가지고 좀 더 색다른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러던 중 기억과 기록을 재활용하는 콘텐츠를 만들고 있는 단체인 '3분출판'과 함께 업사이클링 워크숍을 기획하게 되었어요. 보통 개인마다 SNS나 블로그 같은 데에 남겨놨던 글들이 있잖아요. 남들에게 보여줘도 금세 잊히고, 혹은 홀로 소장하고 있는 자신의 일기 같은 글들이요. 그런 글들을 재활용해보자는 콘셉트였어요. 정식으로 발행하진 못하지만, 자신만의 콘텐츠를 가지고 있는 분들을 모아서 같이 독립 출판을 해보는 것.
많은 분이 각자의 이야기를 와주셨는데요, 여기에 각각 자신만의 생활 의제가 들어있는 거예요. 가령 장애를 갖게 되신 어떤 참여자분은 자신이 장애를 가진 이후 사회에서 어떤 한계에 마주치게 됐는지에 대해, 또 사회적 소수자의 입장에 있는 어떤 분은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해. 이런 이야기들은 정책 토론 같은 정치적 활동이 아니지요. 그러나 모두 자신의 처지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의제'의 성격을 갖고 있어요. '문화 콘텐츠를 통한 생활 의제의 발굴'인 거죠.
꼭 뭔가 특별해 보이는 사람들만이 의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가령 초등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을 대상으로 사진찍기 이벤트를 가지고 생활 의제를 만들어본 적도 있죠. 학부모님들은 도로, 신호등 같은 거리 위의 안전 이슈를 카메라에 담았죠.
그럼 초등학생들은 어땠을까요? 놀랍게도 아이들에게도 자신만의 의제가 있었어요. 자신들이 뛰어놀 놀이 공간이 부족하다는 게 대표적이었죠. 지금의 놀이터는 재미가 없다, 혹은 시설이 부족하다는 시각 같은 것들이요. 이게 성인으로 치면 그들이 향유할 수 없는 문화공간이 없다는 거죠. 결국 다들 그들만의 이야기, 의제가 있는 거예요.
정치의 '허들' 낮추기
물론 이러한 생활의제들이 사회를 직접적으로 바꾸기는 어려울 거예요. 한 사람이 가진 생활상의 의제가 행정의 영역으로 나아가기까지엔 너무 많은 과정이 필요하죠. 한국에는 그러기 위한 거버넌스 체계가 잘 잡혀있지도 못하고요.
행정의 언어와 생활의 언어는 너무 다르고, 그래서 자신의 의제를 피력하는 사람들은 효능감을 느끼기가 어려워요. 몇 번 시도하다가도 무력감에 포기하게 되는 이유죠. 정치혐오도 그런 식으로 일어나잖아요. '투표를 해도 내 삶엔 변화가 없어. 그냥 안 할래.'
결국, 시민들의 생활 의제와 정치/행정 영역 사이에 큰 허들이 있는 거죠. 저는 이 '허들'을 좀 낮추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시민들이 자신의 의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말하는 경험도 굉장히 중요하고, 행정 영역의 사람들이 좀 더 내려오는 일도 필요하겠죠. 시민들에게 더 가깝게, 시민참여가 더 활발해질 수 있도록. 문화기획자로서 제가 하는 일은, 결국 그걸 가능하게 하기 위한 문화적 '장'을 기획하는 거예요. 시민이 자신의 이야기, 자신의 콘텐츠를 보이고 알리고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장.
기획·편집_청년자치정부준비단
인터뷰·글_한예섭
사진_김재기
세상은 이해하기 어려운 규칙들로 가득하다. 1980·90년대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준, 과정, 결과들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여기 관성을 넘어 다른 시각으로, 기성세대가 이끄는 룰에서 벗어나 보다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나가는 ‘빌더’들이 있다. 우리의 삶과 세상에 크고 작은 균열을 가져올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서핑과 위스키만으론 바뀌지 않는 당신의 삶에, 어딘가 색다른 균열이 생기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