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빌더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세바농이 세상을 바꾸는 법

새로운 규칙, 다른 서울 #19_세바농_김하정, 김수진

많은 분들이 잘못 생각하는 게 하나 있어요. 청각장애인은 다 똑같을 것이라고요.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반대로 물어볼게요. 비장애인은 다 똑같나요? 여자들은 다 똑같나요? 그건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청각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다 달라요. 스펙트럼이 아주 다양하답니다. 청력 손상 정도부터 청력상실 시기, 사용 중인 보장구, 의사소통 방법(수어, 음성언어, 필담, 수어와 음성언어 동시구사 등), 자신의 청각장애를 어떤 개념(병적 개념 또는 사회문화적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등 모두가 다 천차만별이에요.  


세바농: 세상을 바꾸는 농인들 


그래서 많은 모임들이 그렇듯, 저희도 처음 모일 땐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다행히 막상 만나보니 호흡도 잘 맞고 공감대도 확실했죠. 개인마다 다양한 삶과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청각장애'로 인한 어려움과 차별의 경험은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바로 그게 저희가 모인 이유거든요.  


저희 모임의 이름은 '세바농' 풀어쓰면, '세상을 바꾸는 농인들'이에요. 농인/청각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편견을 당사자들이 주체가 되어 바로잡고, 더 나아가 청인 중심적인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모였어요. 모임을 세우고 본격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18년 6월이고, 지금까지 사회를 바꾸기 위한 다양한 시도와 활동들을 직접 하고 있어요.  


SNS를 중심으로 농인/청각장애인을 키워드로 한 카드 뉴스, 영상을 제작해 배포하고 해외 농인 유튜버들의 영상 콘텐츠를 번역함으로써 청인뿐만 아니라 농인/청각장애인들도 보고 사고를 좀 더 넓힐 수 있게 하고 있어요. 농인의 언어인 수어, 농인으로서의 정체성(Deaf Identity) 등을 주제로 청인(청각장애가 없는 사람)들과 인터뷰도 했지요. 유튜브에 씨리얼을 검색하시면 저희들을 만나볼 수 있을 거예요.  


당사자가 직접 말하는 농인의 삶 


콘텐츠를 만드는 데 있어 저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농인/청각장애인 당사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청인(hearing peoeple)의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것에 있어요. 청인의 입장에서 보는 농인/청각장애인은 불쌍한 이미지가 대부분이었거든요. 미디어에서 농인/청각장애인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해도 주로 청인이 주체가 되어 농인/청각장애인을 취재하는 방식이 대부분이라, 당연한 얘기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죠. 청인의 기준과 관점으로만 보고 자신들의 생각을 넣어서 편집하여 방송에 내보내는 경우가 여럿 있었거든요. 대표적으로 '수어 노래' 혹은 '청각장애 극복',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언어, 수화' 이런 것들이 있죠. 하지만 정작 농인들의 어려움은 깊이 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게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저희 유튜브 채널에서는 당사자들이 직접 기획하고, 영상 촬영 및 편집을 하고 있어요. 당사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드는 거니까, 당연히 당사자들의 솔직 담백한 이야기들, 나아가 청인 사회에 말하기 힘들었던 민감한 이야기들까지 끄집어낼 수 있죠. 청인분들의 입장에서도 지금껏 알지 못했던 새롭고 신선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요.


실제로 유튜브 콘텐츠에 대한 반응은 굉장히 뜨거운 편이에요. 그 일례로 BBC의 “농인/청각장애인에게 하면 안 되는 말들(원제: Things Not Say to Deaf People)” 번역 영상은 청각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말들과 행동들을 꼬집은 콘텐츠로 당사자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었죠. 청인들도 농인/청각장애인에게 하면 안 되는 말들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게 됐고요.  


그리고 세바농에서 직접 제작한 영상 콘텐츠 “너, 이게 얼 만지는 아니?/ 보청기와 인공와우에 대한 모든 것”은 호응이 특히 뜨거웠죠. 보청기와 인공와우는 청각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의료기기(보장구)인데, 사실 이름만 들어보고 이게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는 청인들이 많거든요. 보청기와 인공와우의 가격이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원인 줄 몰랐다는 청인들과 <목소리의 형태>가 농인/청각장애인에게 불편한 작품이라는 것도 새로 알게 됐다는 청인들도 많았어요.  

우리가 알지 못했던, 당사자의 고민들 


의료기기에 대한 지식만 봐도 그렇듯, 농인/청각장애인들에게는 당사자가 아니라면 알지 못하는 고민거리들이 많아요. 장애인을 위한 사회적 인프라가 부족한 만큼, 아주 사소한 부분부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죠.  


가령 카드회사나 은행, 보험회사 등의 본인인증 시스템을 생각해보세요. 청인(hearing peoeple)들은 통화 한 번으로 간단하게 해결되지만, ARS를 이용하지 못하는 농인/청각장애인 고객들은 본인인증을 하기 위해 무조건 회사에 내방해야만 해요.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땐 어떨까요? 농인을 위한 수어 통역사가 존재하는 대학병원은 전국을 합쳐 5곳도 안 돼요. 보호자가 없는 성인 환자의 경우 더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죠. 수어를 아예 하나도 모르는 청각장애인도 정말 많거든요. 설상가상으로 문자통역이 지원되는 병원은 단 한 곳도 없어 그들은 더 힘들다고 봐야겠죠. 최근 미세먼지가 심해서 많은 분들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니고 있는데요. 이 때문에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인/청각장애인도 많이 있답니다. 청인이 마스크로 입을 가린 상태에서 크게 얘기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거든요. 


지진이나 화재, 혹은 엘리베이터 정지 같은 비상상황이 일어났을 때는 어떨까요? 농인과 청각장애인을 위한 재난/비상상황 대처 방안은 사회적으로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에요. 농인과 청각장애인의 교육권이나 정보접근권에 대한 보장도 잘 되어 있지 않고, 통신 중개사 대거 해고로 지금도 많은 농인/청각장애인들이 107 손말이음센터 통신중계 서비스의 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통신중계 서비스가 안되니까 병원 예약도 못하고 있고.  


수어를 청인이 수어를 오남용 하거나, 케이블 방송에서 수어를 외계어라고 표현하는 등 농인의 고유언어인 수어에 대한 무시와 기본 존중이 없는 태도, 그리고 예능 방송에서 '고요 속의 외침' 게임처럼 청각장애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과 그 주변 분위기를 희화화하는 그런 불편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또, 정치인을 비방할 때 귀머거리, 벙어리라는 단어를 쓰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것들을 보면 농인과 수어, 그리고 청각장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어요. 저희는 이런 분들을 '청인스럽다'표현한답니다. (웃음) 아,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청인들도 청각장애인이 뭐만 하면 '역시 청각장애인' 이러지 않나요? 개개인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서 보고 그러는 게 많이 아쉽죠. 서로 역지사지의 자세가 필요한 것 같아요.  


더불어 경제적인 어려움도 빼놓을 수 없어요. 비장애인에 비해 취업기회가 턱없이 적고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장애인들이 많은 상황에서, 언어치료나 보장구 구매 및 유지비에 대한 부담은 높을 수밖에 없어요. 모두 하나같이 정책적인 해결이 시급한 사안들이죠. 국가 또는 지방정부의 지속적인 경제적 지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보청기나 인공와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의 정보 접근성 개선 노력도 같이 수반되면 더 좋죠. 문자통역 또는 수어 통역 같은 의사소통 지원 서비스도 우리에게는 꼭 필요하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107 손말이음센터가 하루빨리 정상화되었으면 좋겠네요. 아직도 손말이음센터가 안 돼서 치킨과 피자를 못 시키고 있어요. (웃음) 

여성이자 농인, '우리'의 삶을 위해서 


농인/ 청각장애인으로서의 어려움 외에도 저희가 집중하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어요. 바로 여성으로서의 삶이죠. 저희 '세바농'은 농인/청각장애인이자 '여성'인 사람들의 모임이거든요.  혹시, 일본 애니메이션 <목소리의 형태> 개봉 당시 청인 남성들의 '성희롱 댓글'에 대해 아시나요? 당시 작품 속에 그려진 “착하고 순수하고 예쁜 청각장애인 여친”이미지를 빌미로 갖은 희롱과 편견 섞인 댓글들이 등장했죠. “작고 예쁜 손으로 수화하는 청각장애인 여성을 보면 꼴린다”, “청각장애인 여성 특유의 어눌한 발음이 귀엽다” 등.  


장애가 그럴 듯 '여성'이라는 정체성 또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회에서, 여성 농인과 여성 청각장애인은 '청각장애'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으로 인한 이중고에 시달릴 수 밖에 없어요. 특히 비혼 주의, 독신주의자인 여성 농인/청각장애인은 생존에 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죠. 이런 것들은 여성 농인들의 모임인 '세바농'멤버들이 공유하는 중요한 공감대 중 하나랍니다.  

그리고 이는 저희가 각자 생업을 유지하면서도 어떻게든 '세바농'활동에 매달리는 이유이기도 해요. '여성'이자 '농인'인 우리가 겪는 이 사회의 부조리함을 바꾸기 위해서.  



세바농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changedeaf2018/

세바농 페이스북페이지: https://www.facebook.com/changedeaf2018/


기획·편집_청년자치정부준비단

인터뷰·글_한예섭

사진_김재기


2019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멤버를 모집합니다. 정책기획에서부터 예산편성까지,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는 더 넓은 참여 더 많은 변화,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다른 차원의 도약을 시작합니다. 자세한 내용 및 신청은 이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 ☞ ( http://bit.ly/2019청정넷멤버모집 )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만나야 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