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했던 재앙 속에서도

무엇을 탓하기 전에 현실이 되어버린 지금을 살아야 한다

by 무 한소


준희와 정숙이 열정으로 우리가 오프모임을 시작해야만 하는 이유를 가지고 수애를 찾아왔던 때를 기억한다. 열망이 가득한 눈빛이 오갔던 순간이 잠시 멈춘 듯 또렷하다. 양심으로 묻고 답을 한다고 해도 그때는 진심이었으리라. '양심'을 말하는 순간에 정숙은 우리가 흔히 잘 써온 만들어진 '내로남불'이라는 단어를 다시 꺼냈다.


그때의 '찾고 있다'는 열망은 부정적인 생각과 불편한 진실도 가릴 수 있을 만큼 수애에게 전파되는 파급력은 매우 컸다. 이후, 선미를 모임에 영입하는 데는 수애가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별한 경우 횟수가 더 잦아지기도 했지만 대부분 매 달 마지막주 ㅇ요일 오전 10시, 도서관 교양교실에서의 모임은 어김없이 시작되었다. 열정 가득한 분위기를 수애는 자신의 에너지도 한 몫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그곳의 문을 주어 조심스럽지만 활짝 열었다. 그렇게 수애에게 '토닥토닥 토론'이란 독서 모임과 동의어가 될 수 있었다.

수애는 자신의 넘치는 기대의 마음을 책의 첫 문장을 빌려 흉내 내어 보았다.




"서울은 언제나 한국의 동의어였다."


도서관에 모인 그녀들의 표정은 밝고 어딘지 모르게 분주하다. 책 이야기는 처음부터 그녀들의 호기로움을 자극했다. 책을 펼치면 첫 문장부터 강렬하게 우리의 편견을 확실하게 지적하고 있다. 여전히 갇힌 세상과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두를 일깨워준다. 표지에서 처럼 물이 잠식해 버린 그들과 우리가 있는 세상을 표현한 것도, 눈앞에 아른거리고 직접 닿아있는 것처럼 아득한 노을에 깊이 빠져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섬세한 작가의 표현이 돋보인다. 수애가 생각하는 환경 문제에 있어서는 이미 시한부인 한국, 지구의 미래가 마음의 짐처럼 항상 두렵기만 했다. 홍수라는 큰 재앙이 두렵고 무섭기도 하지만 예상하고 있었기에 책 이야기를 나누는 멤버들의 아픔은 더없이 깊어졌다.


당연하고 소중한 것 그렇게 누려온 것들을 포기하고 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면 우린 과연 또 다른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물꾼 선율과 기계인간 수호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현재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벗겨나가며 꼼꼼히 짚어준다. 수애는 책 속 인물들이 과거의 자신과 화해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움직임에 감동을 받았다. 수애와 멤버들에게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금의 환경 문제나 생명의 존엄함과 맞닿아 있어서인지 그들의 마음을 좀 더 움직였다.




수호는 선율과 함께 자신의 기억을 찾아서 과거 살았던 집으로 향한다. 암병동에서 아픔을 견뎌 낼 때만 해도 모든 것을 감사히 경험하고 받아들이리라 생각했는데... 결국 그녀는 기계인간이 되어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다시 시작한다. 안타까움일까. 이입이 쉽지 않은 부분이었다. 다시 시작하지만 평생 깨어 있어야 하고 맛을 느끼고 싶은 부분도 자유롭지 않았다. 부모님의 마음은 딸과 함께 하지 못한 짧은 삶을 안타까워하며 기계인간 수호에게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강요한다. 이전 삶에서 하지 못한 추억 만들기 등을 요구한다. 순전히 부모님의 애잔한 마음이 느껴져 멤버들은 더 안타까웠다.

책에는 지금 우리에게는 자녀의 독립보다 부모의 진정한 독립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가 있다. 정숙의 시간 속에는 가족과 자식에게 덮인 파도가 파노라마가 되어 지나가는 삶이 떠오른다.숙의 삶은 가족에게는 그녀 자신보다 훨씬 빠르게 지났으리라. 그들의 삶도 정숙에게는 그저 카메라에 저장되어 있는 필름정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숙의 생각을 읽어내던 수애는 우리는 모두가 자신 외 타자의 삶에 대해서는 같은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 셔터 한번 또는 여러 번에 걸쳐 나올 수 있는 작품이라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책에서의 디스토피아 세상과 마주했다. 그곳에서는 최악의 상황을 살아가는 일상을 겪기도 하고 그려냈다. 작가가 묘사한 섬세함이 묻어나는 문장은 간결하고 글에서는 힘이 느껴진다. 멤버 모두에게 새로움으로 다가왔고 가독성은 있으나 현실과 연계해서 볼 때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였다. 책 곳곳에 작가의 의지나 노력이 의미 있는 문장으로 수애에게 다가왔다. 작가는 독자에게 전하고 충고하고자 하는 것을 매력적인 인물들과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로 대신한다. 기계인간을 통해서 인간의 존엄성과 과거 기억으로 인한 윤리문제까지 생각할 거리를 만들었다.


멤버들에게 책은 비교적 짧은 sf소설이지만 생각과 메시지는 긴 여운으로 남았다. 말과 의식적으로만 무력하게 믿어왔던 지금 현재를, 순간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수애는 자신을 제외한 제1의 제2의 타인은 결코 내가 아니기에 스스로 지닌 고민과 아픔을 혼자 겪어 나가야 한다고 믿었다. 철저하게 혼자를 경험한 지금의 그녀들이 다시 돌아봐야 할 건 각자가 겪은 우리의 오늘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수애를 둘러싸고 있는 오늘의 이 공기와 바람과 하늘, 땅이 사랑스럽고 감사하다. 모임을 마무리하며 멤버들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책을 챙겨 텅 빈 교양교실 전체를 차분히 훑고 문을 닫으며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문장을 되뇐다.


"관계는 계속 이어진다."



발췌문)

131p

그냥 그런 세상이 있었던 거지. 없어진 것도, 아주 먼 곳에 있는 것도 눈앞에 다시 불러낼 수 있었던 세상이 그게 너무 당연해서 만질 수 있는 무언가를 간직할 필요가 없던 세상이.


159p

닿지 못할 행복은 생생한 만큼 슬픔이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은 그대로 남아 후회가 된다. 살아가다 보면 지나간 순간을 다시 볼 기회가 생기지만 그 반대의 일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과거가 오늘을 옭아매는 것이다. 삼촌이 그렇고 우찬이 그런 것처럼. 그들이 소용없는 죄책감을, 울분을 간직하는 것처럼.


175p

언제라도 건져 낼 수 있지만 아직은 잠들어 있는 기억들을 해먹으로 삼으려는 것처럼. 그리고 거기에 너무 이끌리거나 멀어지려 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거리만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처럼.


토론에서 수애가 멤버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다채로운 생각을 함께 나누려고 미리 준비한 질문이다.

질문)

여러분은 삭제된 기억에서 어느 날 스스로 기억하고 있던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깨어난다면 과연 어떤 마음일까요? (여러분이 기계 인간이 되어버린 수호와 같은 입장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기계인간, 복제품에 대해서는 벌써 여러 의견들이 확실하게 나뉘고 있죠. 여러분은 수호를 다시 태어나게 만든 기계인간, 복제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도서관이나 때로는 급조된 카페에서의 토론 모임 이후의 감정 또한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간다. 토론 중 이성과 그것보다 빠른 감성이 수애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연무로 주변을 가득 채운 정숙의 알듯 알 수 없는 말과 행동 그리고 최후의 리액션까지 뭔지 모를 불편함이 몰려왔다. 가끔 절대적인 노력으로 책과 모임의 성격에만 집중했으며 너무나도 감성적인 수애는 책에서 한동안 나오지 못했다. 잘하려는 욕구에서 시작된 스트레스는 건강한가. 앞으로도 수애를 반복해서 자극할 욕망, 그것은 인간을 발전하게도 하고 파멸로 몰아가기도 하리라.


토론 장소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면 수애를 비롯한 그녀들이 느끼는 감정은 매 순간 다채로움으로 착각할 만큼 각자 다르다. 수애는 오늘 잠시 악몽을 꿨다. 책 다이브에서의 환경과 같이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재앙 중 하나인 큰 홍수로 완전히 변해버린 한국. 그 경험이 현실로 온다면 그것이야말로 악몽이다. 만약 악몽이 아닌 현실이라면 선율처럼 적응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밖으로 나와서 긴 호흡으로 들어마신 숨과 시선 저편으로 끊임없이 펼쳐진 세상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수애를 괴롭히던 이성과 감정사이의 혼란, 그것을 좌지우지 주도해 오던 정숙의 모순적 모습, 무엇보다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려는 선미의 태도는 수애의 감정을 더 깊은 곳까지 떨어지게 했다. 지금 당장 호흡할 수 있는 공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얼마나 영구적 일지 알 수 없지만 공기를 제공하는 지구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악몽에서 깨어난 수애는 되뇐다. "소중한 지구를 진심으로 더 사랑해야지. 더 이상 아프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