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 한소 Sep 07. 2024

맹목적 추앙의 그림자 상수함수

사랑에 가려진 무질서

아주잠깐 그들이 속한 시공간이 정지 화면처럼 멈춰버렸다. 그곳에는 중력이 없는 것 같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른 차원에서 서로를 향해 소리 내고 듣고 움직이는 것처럼. 수애와 도서관 교양교실 안에 있던 친구들은 윤이가 삶에 던진 질문의 해답을 찾고 있거나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항등함수의 처음을 생각했다. 친구들 모두 일시 정지된 화면에서 말을 듣지 못하는 듯한 몸동작으로 고요의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지난 화에 이어서


고요의 바다, 파도가 잠잠해진 마치 바다 깊은 곳에서부터 일고 있는 해일 전야의 고요한 바다를 꿈꾸듯 그런 조용한 바다였다. 아주 작은 돌이 던져진 후 갑자기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최근 한결은 학생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관심인 자신의 탄생부터 돌아보며 삶을 파헤치고 있. 사실 한결은 출생에서부터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엄마의 몸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던 그 시간 한결의 외조부모와 삼촌과 이모가 한결에게 달려가던 길에 자동차 사고가 있었다. 8중 추돌이라 했다. 사고가 너무나 컸다고 전했으며 이모와 삼촌은 여전히 그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하다. 조부모는 그렇게 한결의 출생과 그분들의 삶을 맞바꾼 후 소멸되듯 사라졌다. 한결의 엄마는 산후 호르몬 변화와 하루아침에 사별이라는 상실감으로 의지 회로가 완전히 무너졌다. 힘들어하던 시간이 점점 깊어지자 아빠의 시선에 한결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기에게는 애착관계인 엄마의 심장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나 우울증을 겪고 있는 엄마 심장과 초점 없는 멍한 눈동자가 아이의 성장에 아픔을 안겨주리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결국, 한결의 아빠는 그 순간 엄마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치료라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한 결과 아빠만이 더 고요해진 집에 남게 되었고 다시 한결만이 고독한 집을 지키게 되었다. 아빠는 바빴다. 어쩌면 더 바빠지려고 의도적으로 그런 방식을 삶에 접근하는지도 모른다. 혼자 고독한 집을 지키는 횟수가 늘어나며 한결은 자신의 탄생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탄생에 깔려있는 죽음, 조건과 무조건적 사랑, 덤덤함과 트라우마가 끼치는 영향과 지킴의 균형까지 한결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자꾸 쌓여간다. 그래서 이번에 한결이 뱉어내듯 던진 논제는 친구들과 수애의 심장을 모처럼 강하게 마사지해 주었고 빠르게 뛰는 심장만큼 교양교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에너지로 어수선해졌다. 한결이 보드판에 굵고 짧은 두줄로 수식을 썼다.



           f(x)=a, y=a (단, a는 상수)

           f(x)=3, y=2


"위의 식을 보면 어떠한 x값에 대해서도 y의 값은 일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와 같은 함수를 상수함라 합니다. 아시죠? 개인적으로 상수함수를 좋아하지 않아요. 음... 도망 다녔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이해하기 편할 겁니다. 상수함수를 보면 삶의 관계에서 ‘맹목적 수용’이 떠오릅니다. 자꾸만 저를 보는 거 같아요. 나의 탄생도 조부모의 죽음도 내가 선택할 수는 없었죠. 마찬가지로 태어나면서 운명적 관계 맺기가 시작되었어요. 사랑조차도 그들의 다양한 모습과 질량이나 크기까지 자신들이 정해서 다채로운 색으로 전달했죠. 그래도 그땐 그 어떤 사랑이든 감사했으니까요.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더라고요. 기울어진 직선 위에서 균형이라는 걸 찾을 수 있을까. 이미 기울어진 세상에서 공정을 운운한다는 건 처음부터 이룰 수 없는 모순이었던 걸까. 균형이라는  뭘까.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의 마지막 책임이 거품처럼 사라지며 그 힘이 소멸되는 파도의 처음은 거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여러분에게 상수함수가 어떻게 닿았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저처럼 이미 고민해 온 누군가가 존재하리라 생각합니다. 함께 나눌 수 있을까요"


한결의 시선은 멀리 있었다. 도서관 건너 공원이 보이는 저편으로 탄생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를 한결의 강한 삶의 의지를 쫒으며 수애는 상수함수를 떠올렸다. 일방적인, 이기적인, 어떤 경우라도 상수함수에서 상호협력이나 교감을 찾을 수는 없다. 양의 값으로 나타난 상수함수도, 음의 값으로 나타난 상수함수도 x의 선택, 그녀의 선택은 의미 없다는 것을.


수애는 얼마 전 토론에서 함께 나누었던 《연기인간》  떠올려본다. 상수함수 그래프와 함께. 사람들은 연기인간의 의지나 의중에 상관없이 관중, 관객들의 입장에 맞춰 그를 한없이 추앙했다. 이유와 상황을 들며 더 높이 올려두었다. 어쩌면 연기인간은 멀리 있을 때 그 형체가 가장 뚜렷하고 소명이나 사명이 선 굵은 혈서로 쓴 의지처럼 돋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곁에 두려 한다면 그 형체는 연기로, 물방울로 희미해지다 사라지게 된다. 인간이 그토록 찾으려 했던 삶의 가치나 의미도 같지 않을까. 수애는 생각에 사로잡혀 연기인간이 사라진 것 역시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이 선택한 높은 자리에 추앙이라는 단어로 옮겨갔다. 그리고 다시 그 자리에서 떨어뜨려 상수함수의 값을 음의 값으로 만들었다. 연기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높은 자리에서 그를 추앙했던 인간들을 바라보았으며 순식간에 그 높이에서 다시 추락한다. 수애가 의도적으로 도망쳐왔던 사회적 제도로 엮인 여러 관계에서처럼. 연기인간은 소멸했다. 물론 물리적 관계를 넘어선 정신으로 연결된 관계에서는 단절이나 소멸이 아닌 영속이라는 믿음으로 말한다.  수애는 인간이 가진 원초적 욕망이라 하기엔 지나친 진리에 대해 진실과 거짓을 되뇐다. 지금 같은 공간에서 함께 나누는 이 친구들과 상수함수에 대해 다시 묻고 대답한다.


"선생님이 사랑하는 함수의 세상에는 다채로운 그래프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좌표평면 여기저기에 있단다. 물론, 직선과 곡선의 다양한 모습의 모든 그래프가 함수의 세상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겠지. 그런데, 선생님 시선에 함수의 검열에 걸려서 그저 주변을 맴돌고 있는 직선이나 곡선의 그래프가 자주 눈에 띈단다. 마음 아프게도. 그런 검열에 걸리는 그래프는..."

수애의 이야기에 과몰입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영성이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든다. 수애가 고개를 끄덕이자 랩을 준비하던 래퍼처럼 속사포로 그래프들을 열거했다.  "x=a, y²=4px, x²+y²=r² 등의 그래프는 좌표평면 위에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나 감독관의 검열을 뚫고 함수의 세상에는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프들을 살펴보면 누가 저 계약을 위반했는지 또는 어떤 조직이나 단체 안에 들어가려면 그 단체에서 정한 규정을 지켜야 인정권리 찾기까지 가능한데 그걸 지키지 못했던 거죠."


 수애는 모습으로도 비교가 가능한 검열의 경계를 넘지 못한 다양한 그래프를 살피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삶의 방식이 답답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과 닮은 상수함수의 입장에서 맹목적 수용... 자신이 지나치게 불편했던 어느 순간의 기억을 되짚어본다. 그곳은 질서로 위장하고 있었으며 무질서의 편견과 선입견이 덮고 있었다. 맹목적 수용에서 평소 맹목적이란 단어가 수애에게 던지는 의미를 되뇌어본다. 그동안 맹목적이란 단어가 수애는 계속해서 불편했다. 조금 더 깊이 맹목에 들어가 보면 맹목이란 주관이나 원칙 없이 덮어놓고 받아들여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맹목적이란 단어 자체에 이미 편견이나 선입견이 들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수애였기에 경옥이 지금까지 한 번씩 보여주는 아들을 향한 맹목적 사랑에 지쳐있었다. 경옥의 그런 태도나 마음이 느껴질 때면 짜증이 치밀어 안 그래도 아픔이 많을 경옥의 상처를 들쑤시기 일쑤였다. 맹목적 사랑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는 경옥의 입장이 아닌 그걸 지켜보는 자신은 안타깝지만 원칙이나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기울어진 것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그것부터 경옥의 사랑은 이미 기울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사랑은 상수함수의 사랑이 아니어야 해. 서로 깊은 상처를 주고 말 거야." 하고 싶었던 마음의 소리가 수애에게 표독스럽게 울부짖는다. 수애는 의식이나 생각이 정체된다는 건 현실에서 피해야 할 가장 큰 위험이라고 생각해 왔다. 물론 정체되는 것보다 피해야 하거나 더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맹목적 수용이 아닐까. 수애는 스스로, 또 타자에게 이것이야말로 현실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한 사랑의 모습이라고 경고했다.


삶에 깊이 뛰어들었다고 하기에 너무나 맑고 깨끗한 규선이 수애를 향해 손을 드는 대신 하트를 만들어 보인다. 수애가 활짝 웃으며 규선이 했던 대로 하트를 그렸다. 규선이는 상수함수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인간의 삶과 관계에서 사랑의 모습 중 무조건적 수용이 떠오른다고 했다. 잠시 쉬며 호흡을 고른다. 규선은 자신이 읽었던 책을 기억하며 머릿속의 질서와 혼란을 확인해 보니 질서를 위장한 무질서가 꿈틀대고 다고 기억했다. 꿈틀거리던 혼란에서 부정적 차단보다 더 강력한 것이 번쩍였다. "제가 이어가는 관계에서 아직은 스펙트럼의 한계가 있으나 책에서나 학교에서 결국 관계의 차단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착각 속에 버젓이 정상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맹목적 수용이라 생각합니다." 규선은 다시 입을 야무지고 단단하게 꼭 닫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천천히 앞으로 나간다. 그리고 힘주어 상수 함수를 쓰고 입으로 말하고 그래프를 좌표평면에 그렸다.


f(x)=a (단, a는 상수)


"f(x)=a, y=a보이는 것처럼 x 축에 평행한 직선이며 모양은 항상 일정합니다. 이와 같은 상수함수와는 다르게 y축에 평행인 x=a가 함수가 될 수 없는 건, x값 각각에 대하여 수많은 y의 값을 때문이죠. 욕심쟁이인 거죠. 반면에 y=a는 다양한 x값 각각에 대해 y 값이 하나로만 나타납니다. 마치 순정파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그때의 y 값은 매번 같은 값을 나타내죠. 그런데 저는 어쩌죠. y=a와 같은 상수함수 모양을 한 그래프를 보며 반감이 들어요. 관계에 있어서 타자의 맹목적 수용은 편안하지 않습니다. 앞서 수애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건 생각의 정체보다 더 위험하다고 감지했었죠. 여기서 함께 나눠 볼 문제를 전합니다. 상수함수의 맹목적 수용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 수용이란 무엇일까요?" 보편적 수용은 일반 함수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감각을 깨우는 아이들의 생각과 그들이 만든 시선을 통해 수애는 상수함수에서 보여 준 맹목적 수용을 사랑이 가리고 잠시 혼란을 틈타 나온 질서처럼 위장하고 있는 무질서를 깨닫는 순간 현실의 관계가 제대로 보였다.


규선의 이야기에 입을 벌리고 몰입해 듣던 민하가 갑자기 일어선다. 그제야 중심을 잡지 못한 다리를 뒤뚱거리며 헛걸음질 한 후 민망한 손을 든다. 수애도 아이들도 집중이 너무 과해 무게에 짓눌려 있었을까. 분위기를 바꿔준 민하가 고맙기만 하다. 민하는 마인드 맵을 하듯 천천히 가끔은 더듬거리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말했다.


"무조건적 수용은 상수함수의 모든 y값과 같습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x의 값은 항상 같은 y의 값이지만, y의 값 각각에 대응되고요. 저에게도 상수함수는 일방적으로 느껴졌답니다. 사랑으로 가려진 맹목적 수용은 갇힌 공간에서의 질서처럼 답답했어요. 그런데 사실 그것은 질서로 위장한 무질서였는지도. 질서가 있는 듯 꾸며진 대응 관계... 이런 위장된 대응관계에서도 함수는 성립할까요. 질서가 있는 듯 단출해 보이는 상수함수는 그저 맹목적으로 수용을 합니다. 그건 현실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요.

          

윤이가 자신의 자리에 대해 고민하고 힘들었을 때 곁에 계신 할머니를 지키내리라는 단단한 마음에 수애를 찾아갔었다. 수애는 윤이의 슬픈 눈을 한없이 바라보다 깊은 한숨을 뱉어내며 함수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윤아, 함수가 뭘까. 윤이가 생각하는 함수는 대응관계일까.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를 자국민들은 당연히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기본 중의 기본적 자세라고 생각해. 물론 그 속에서도 자신의 기준과 판단은 확실해야겠지. 이처럼 맹목적 수용은 자칫 질서처럼 보이지만 사랑에 가려진 혼란이라고 말할 수 있단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런데도 자국민이기에 자기 나라 문화를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하는 일종의 의리 같은 게 있겠지. 그게 바로 모순이 아닐까. 상수함수를 우리 문화에 적용한 것은 함수라는 단어의 깊이만큼 윤이와 나의 일상이 깊게 느껴졌기에 가능했던 거 같아." 수애는 삶에 녹아있는 진정한 수학을 알아가고 그 세계에서 아이들과 윤이와 그녀가 함께 노닐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x=a는 x값 하나에 수도 없이 많은 y 값이 대응되죠. 지금 보니 확실히 y=a의 함수와는 구분되는 직선인 거죠. x=a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함수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다는  보여요. 제 눈엔 x=a가 사랑에 가려진 혼란(y=a) 보다 더 큰 문제는 한 나라에 태어난 국민 각각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는  아닐까. 그러나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문화만을 고집(x=a)할 수는 없겠죠. 다른 의식, 생각 등 수없이 많은 고집의 결괏값이 나온다면 그걸 하나로 뽑아내기는 어렵다는 거예요.     

함수의 정의에서 얻어지는 당연함과 그들 간의 연결로 나타나는 삶의 관계가 정체되지 않기를, 무엇보다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윤이의 마무리에 수애는 이상하게 눈물이 나왔다.


수애는 좌표평면에 그려진 두 개의 직선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x=a와 y=a의 두 직선은 y축에 평행인 한 직선과 x축에 평행인 다른 직선의 관계에 있다. 여기서 y=a의 직선만이 함수라 할 수 있다. 수애는 그 이유를 함수가 되기 위한 묵직한 의무를 x=a는 처음부터 저버렸다고 생각했다. 다만 스스로 편안한 방법으로 평면 좌표 위에 그려나간다. 그렇게 하나의 x값에 수많은 y 값을 하나씩 대응했을 뿐이라고. x값 하나에 대하여 수도 없이 많은 y 값이 존재하는 직선은 결국 선택의 책임을 저버렸기에 함수가 될 수 없었다. 이제, 수애가 관심을 가진 x=a의 직선은 x값 하나에 대해서 수없이 많이 나타나는 y 값의 자취, 흔적으로 y축에 평행한 직선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시계 방향이나 반대 방향으로 90° 회전한 y=a의 그래프를 닿지 않은 거리에서 그리워하며 애잔하게 바라볼 뿐이다.

         

한결은 자신이 가졌던 삶과 죽음을 함수의 세상으로 가져가 비교하며 관계의 불안에 놓였던 마음이 더 편안해졌다. 그리고 이제는 탄생에서 시작된 비애를 거부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의 선택이 아니었어. 내 의지가 아닌 그들에 의해서 선택된 것뿐이야." 하고 마음을 먹자 함수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함수이기를 포기한 x=a의 비애가 모순처럼 느껴진다.

상수함수 y=a가 보인 맹목적 수용의 위험한 경고가 와닿는다.

이전 19화 한결같았던 항등함수의 그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