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그 이후

그는 광장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by 무 한소

[광장]_최인훈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첫 문장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수애는 20년 전 처음 [광장]을 만났고 그때 역시 첫 문장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조금의 변화를 거쳐 다시 그녀에게 돌아온 지금, 첫 문장은 그녀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읽고 다시 읽으며 되뇐다. 언젠가 20대를 넘기지 않았을 때 책을 접하며 작가의 사고와 필력에 매료되었고 동경했었다. 수애는 걷고 있는 산책길에서 뒤를 돌아보며 과거를 생각했다. 쭉 동경해 왔었다. 그녀의 20대, 처음 만났을 때 광장은 첫 문장과는 다르게 수애를 잡아끌지 못했다. 그때는 그녀가 작가의 이념과 시대적 가치를 이해하기에 지나치게 현실을 쫓고 있었던 걸까? 그때까지 겪어온 좁고 얕은 경험 때문이었을까?


수애는 생각하고 새로운 꿈을 꾸었다.


때로는 안도했다.

가끔은 감사했다.

지금, 이 시간(2023년)을 살아갈 수 있어서.


가끔은 갇힌 프레임 안의 자유를 더한 자유로움으로 느꼈다.

그래서 더 안도했다.

가끔은 더 더 감사했다.


그렇다고 작가가 쫓으려 했던 이상이, 이상이 아닌 희망적 현실로 완전한 이념과 자유로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지구 어느 곳에서든 작가가 꿈꿔온, 명준이 꿈꿨던 그리고 수애가 꿈꾸는 '이상'이 해결된 것은 아니리라. 명준이 꿈꾸었던 중립적인 이상은 찾을 수 없었다. 밀실과 광장 그리고 작가가 꿈꾸며 잠시 방향을 바꾸었던 제 삼국 어디에서도.


지금도 한국은 개인의 자유와 이익만을 추구하는 밀실일지도 모른다. 긴 시간 너무나 익숙한 지금의 밀실에서 우리는 당연하게 지내왔는지도 모른다. 1960년대나 지금 북한 또한 개인의 자유가 사라지고 국가와 사회적인 이데올로기만 존재하는 광장일지 모른다. 세대가 거듭되고 체제가 변화를 겪으며 이념과 이상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사실 습도 높은 계절에 수애는 읽기도 쓰기도 놓아 버리고 싶었다. 도서관에서 하는 정기적인 모임이 부담감으로 다가왔지만 마음의 변화가 있었다. 토론을 위한 재독이었지만 눈을 제대로 떴다.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이번에는 작가의 마음을 섬세한 부분까지 공감해 보았다. 그래서 아팠다. 수애는 어디에 있어도 마음을 둘 수 없는 작가를 생각하며 애잔해진다. 걷는 동안 적당히 땀이 흐른다. 수애는 오전부터 거리를 더 헤맸다가는 토론 전부터 컨디션 관리가 제대로 안될 거 같아 2바퀴를 돌고 나서는 더 걷기를 포기해 버렸다. 숨을 참고 그 자리에 섰더니 땀이 비 오듯 흐른다. 땀범벅이 되었다. 얼굴의 땀 일부는 손으로 적당히 닦아내고 수애는 도서관 엘리베이터에 헥헥거리며 올랐다.


수애가 토론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직 아무도 없었다. 도서관 관계자께서 미리 오픈하고 에어컨도 틀어놓았는데 수애를 달아오르게 한 열기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리고 광장을 다시 연계해서 생각했다. 수애는 밀실과 광장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대를 거듭하고 70년이라는 긴 시간을 지난 지금이지만 과거의 밀실과 광장을 버리지 못하고 때론, 누군가는 당연한 듯 익숙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도 정부는 여전히 감추며 덮기를 반복한다. 명준이 그랬던 것처럼 수애는 밀실을 믿지 않았다. 또한 광장을 믿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의 생각은 특정 지점에 머물러 같은 문장만 반복하고 있었다.


빼꼼히 문을 열고서 얼굴을 내밀어 보이던 한 사람이 들어왔다. 영화였다. 이어서 준희도 들어왔다. 준희는 수애와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번 책 [광장]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열정 많은 그녀의 썰이 시작되었다.


명준이 찾았던 공간, 작가가 바랐던 이상은 밀실과 광장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었으리라. 이념과 자유가 공존하는 조화롭고 이상적인 공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중립국인 제 삼국은 명준과 작가가 가고 싶었던 곳이 아니라 밀실과 광장을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곳이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상이 존재하지 않음을. 결국, 명준은 이상국을 향해 움직이는 배에서 삶을 포기했다. 수애는 명준을 통해 좌절감이 들었다. 이념적 대립이 없는 이상에 대한 동경과 이후 좌절은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한숨지으며 모두 슬픈 눈을 하고 지친 감정을 위로하듯 토론은 이데올로기나 자유를 얘기할 때보다 편안하게 흘러간다.


수애는 자신과 모인 멤버 전원에게 질문했다. "최인훈 작가님의 노력, 명준이 그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닿은 그 시간 이후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이후... 지금 우리는 어떤 노력을 했는가?"

작가는 끊임없이 몸부림쳤다. 수애가 아는 작가는 표현이 고급지며 세련된 방법으로 연신 이상에 대한 노력을 표출했다. 작가의 이상과 문장을 동경해 왔고 지금은 그 노력에 마음을 다독이며 각자의 이상을 생각해 본다.


"덜 더함은 있을 망정, 더럽혀지지 않은 손은 없을 터였다." "사람과 짐승이 섞이는 광장."

전쟁과 이후의 참상, 아픔이 깊이 와닿는 문장이다. 책에서 꼽을 수 있는 문장으로 정숙은 발췌문을 친절하고 차분하게 읽어 주었다. 모두에게 울림이 전달되었을까. 그녀들의 무기력하고 방관적인 자세에 대해서도 멤버 중 누군가가 언급했다. 순간 누구가 아닌 그녀들의 반성이 필요했던 것처럼 멤버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아름다운 물건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대로는 더럽게밖에 보이지 않던 물건이 그대로 아름다움 속에 돋아나 보이는 건 마음이 더 높은 곳으로 옮겨갔다는 겁니다."

토론 내내 처음부터 끝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연지가 토론 막자지에 입을 연다. 우리 삶과 연계 지어 문장을 발췌하고 다른 멤버에게 읽어주었다. 그녀의 눈을 따라 우리의 삶에서 변화될 수 있는 순간들을 되짚거나 돌아보았다. 수애는 다시 감사하다. 그녀의 시간을 돌려줘서. 그녀의 눈을 밝게 해 줘서. 그녀의 이상이 단지 이상으로 끝나지 않게 해 줘서.


토론의 시간, 명준의 시간으로 너무 깊이 들어갔다 나온 거처럼 지쳐버렸다. 수애는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고 눈을 마주친 멤버 누구나에게 습관처럼 웃어주었다. 계획된 웃음이었다. 도서관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습도를 뒤로하고 내리쬐는 강렬한 햇살을 마주하며 삶을 포기한 명준을 떠올렸다. 그의 상처와 아픔을, 혼란한 시대에 직접 마주한 그의 감정을 진심으로 위로한다. 수애는 감정을 담은 발걸음에서 자신의 시간을 천천히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