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리적 갓심_명제의 진리 집합

극단적 신념(그림 by규림)

by 무 한소

'킹리적 갓심'이라고 아세요?

쌤, 쌤은 킹리적 갓심이라고 아시죠? 수업 중 한 학생의 질문이었다. 집합과 명제 수업을 진행하며 명제의 정의에 대해 나누고 있을 때였다.


명제: p -> q(p이면 q이다)

에 대해 가정과 결론을 분리해서 나누었다. 명의 학생들과 명제의 정의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반짝이는 학생들의 눈빛을 통해 보이는 명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명제는 수학 세상에 들어가 있는 영역이기도 하며 언어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그만큼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다. 이미 수학 학습에 지치고 수학을 싫어하는 학생까지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착각이었다. 명제는 수학의 영역을 포함하며 언어의 영역 전체에 들어가 있다고 여길 만큼 논리적인 것을 따르고 있다. 그만큼 친절하기도 하며 가끔, 극단적이 되기도 한다. 나의 생각과는 달리 명제는 학생들이 '노잼'이라고 말하며 두려워하는 영역 중 하나로 자리매김 했다.


그럼, 명제란 무엇일까? 명제는 참과 거짓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문장이나 식을 말한다. 예를 들면 1+3>5는 거짓인 명제다. 0 ×a=0 은 참인 명제다. 또, 2x+3=7 이것은 조건일 뿐 명제는 아니다. 그리고 이 조건을 참인 명제로 만들어 주는 미지수의 값으로 이루어진 집합을 '진리 집합'이라 한다. 잠시, 진리 집합에 관해 수업 도중에 있었던 재미있는 경험을 옮겨본다.

진리 집합을 설명하기 이전 학생들에게 진리라는 단어에 대해 질문을 했다. 명제에서는 용어의 정의나 의미를 알고 접근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학생들 각자가 생각하는 '진리'란 무엇인지 묻자 먼저 G가 대답했다.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삶에서 존재하는 대부분은 변합니다. 많은 것이 변해도 절대 변하지 않는 생각이나 법칙, 정해진 약속 등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음... 그렇구나! G가 생각하는 진리는 변하지 않음에 초점이 맞춰졌구나. 그럼, D는..? 저요? 저는 진리라면 말씀이 먼저 떠오르는데요. 아~~ 말씀? 다른 친구들이 웃으며 D의 다음 대답에 집중했다. D는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성경에 쓰인 말씀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G와 D가 말한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닐까. 표면적으로 드러난 그들이 말한 진리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한 언어를 잘 정리해 보면 변하지 않은 말씀이 진리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항상 참이 되어야 한다. 거짓이라면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 만들려는 노력 조금의 성장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


명제: p이면 q이다. 명제는 가정과 결론,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다.

역: q이면 p이다.

이: ~p이면 ~q이다. 명제를 부정한 것이다. 부정이란 진리 집합으로 나타내면 여집합을 말한다. 여집합은 전체 집합에서 자신을 뺀 집합이다. 전체 집합 중에서 자신을 뺀 나머지 집합을 말한다.

대우: ~q이면 ~p이다. 대우는 참, 거짓인 명제를 증명할 때 쓰인다. 명제가 참이면 대우도 참이고 명제가 거짓이면 대우도 거짓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부정에 대해서 다시 들여다본다. 명제에서 ~은 부정이며 not를 의미한다. 우리는 흔히 '무'가 아니면 '전부' 또는 '전체'라고 여기는 극단적 신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야말로 가장 불편한 흑백 논리라는 생각이 든다. 수학의 세상에서는 '모두'의 부정을 '무'가 아닌 '어떤'에 두고 있다. 비단, 수학의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는 현실에서도 all의 부정은 some, some의 부정은 all이라는 것에 집중하고 생각의 전환을 해본다. 가득 차 있는 것의 반대되는 개념은 그 속에 1이라도, 어떤 수라도 존재한다면 가능하다.


언제부터인지 현실에서의 흑백 논리가 불편했다. 꽉 찬 것의 반대되는 개념을 무의 세계로 단정 짓는 것이야 말로 긴장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의 이분적 사고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역사적 아픔인 분단 또한 이분적 사고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작은 남과 북의 절대적인 이념, 그 이외의 것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후 귀를 닫고 눈을 감아온 태도에서 분단을 꾸준히 유지해 왔다. 지금은 출발에서 차이가 없었던 두 직선이 사상적 이념과 경제, 문화 등 너무나 먼 거리에서 서로를 지켜보고 있다. 여전히 태도는 출발의 자세와 달라지지 않았다. 서로를 비난하고 가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갸웃하면서 서로를 지켜본다. 이해하려는 배려가 보이지 않는다.


수학의 세상에서는 불편한 이분법적 사고를 딛고 '모든'의 부정을 '무'가 아닌 '어떤'으로 정의했다.

수학의 영역 안에 존재하는 명제에서는 수의 세상과 삶을 함께 좌표에 올려두고 우리의 사고를 가두지 않고 확장하기로 했다. 최소한 흑백논리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그 논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거 또한 쉽지 않다. 다채로운 논리나 명제로 되어있는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 지금 청소년들은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누군가의 입장에서 생각하더라도 참 또는 거짓인 진리를 킹리적 갓심으로 대신하여 쓰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나의 합리적 의심은 동의 이음으로 되어있는 합리적 갓심으로 대신한다.


'킹리적 갓심' 그게 뭘까? 내 물음에 G가 말했다. 선생님이 종종 쓰시는 말씀 중 하나예요. 왜 그런지, 왜 그렇게 되는지 의문을 가지라고, 의심하라고. Y는 덧붙였다. 누구나 봤을 때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나 사건에서 선생님께서 쓰는 거예요. 아~~ 합리적 의심! 그런데 왜 합리적 의심을 킹리적 갓심으로 쓰는 거지? 그건 합리적 의심이나 그것, 그런 상황을 비꼴 때도 많이 쓰이거든요. G의 말은 킹과 갓을 붙여 의미를 강조, 극대화한 거라고 얘기한다.


합리적 의심의 사전적 의미는 감에 의한 의심이 아닌 구체적이고 명확한 사실에 기반한 의심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을 조금 더 강하게 강조하거나 센 어투로 표출하는 것이 킹리적 갓심이다. 그것은 때로는 반대 사실에 대한 비꼬는 의미로도 쓰인다. 이제 무엇이 진실인지 모를 만큼, 강조를 나타내는 킹, 갓, 개 등의 접두사 외에 킹리적 갓심은 진실을 대체해서 쓰고 쓰이고 있다. 적어도 청소년들에게는. 원래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던 근원인 거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의미는 극대화되어 쓰이고 있다.



그림 by규림

글 by무 한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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