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출판단지에 위치해 있는 지혜의 숲을 찾았다. 얼마 만인지.지혜의 숲은 파주시에 위치한 도서관이다. 비영리 복합 문화 공간으로 가치 있는 책을 한데 모아 보존 보호하는 공동 서재라고 소개되어 있듯 그곳에서는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있다. 자연이 배경이 되고 책을 읽어 나가며 커피를 마신다. 그렇게 그려낸 그림을 스스로 감상하며 감성으로 새롭게 그려 내기도 한다.
지혜의 숲은... 우리가 직면해 있는 코로나19 시기 이전에는 나에게 그곳은 딸과 함께 했던 놀이 공간이었다. 오늘 다시 발걸음을 하며 1년이 지난 지금 그때와 비교해보니 주변과 밀집해 있는 밀도는 확연히 줄었으며 그 속에 속해있는 물질들의 영향인지 온도는 높아졌다. 낮아진 밀도는 그곳에서의 대화 한가운데 완전히 집중을 하게 만들었다. 요즘 충분히 즐길만한 곳이라면 환경을 고려해서 짜낸 실내온도 1~2도 높이기처럼 그곳도 환경운동에 앞장서서 실내 온도를 적당히 올렸다.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체온이 오르고 혹시라도 주변과 밀도가 높다면 온도는 더욱 올라 열기로 후끈거리게 된다.
책과 노닐며 여름 더위와 그것도 모자라서 뜨거운 아메리카노의 열기가 더해졌다. 그렇지만 고대했던 S작가님과의 행복한 수다의 시간을 이어간다.대화의 열기가 점차높아질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손부채를 사용해야만 했다. 작가님의 바탕에 부드러움이 깔려있는 강단의 에너지 덕분인지 열기는 점점 더해졌고 마침내 우리는 그곳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도망 나오듯 그곳을 벗어난 보람도 없이 바깥 날씨는 습도까지 한데 어우러져 마스크 속으로 훅 들어오는 열기가 후끈후끈거렸다. 목적은 식사할 장소를 찾는 거였지만 주변의 자연과 어우러져 있는 건물들을 관찰하며 즐기는 시간을 가졌다. 더위속에서도 곳곳의 눈여겨 볼만한 특별하고 예쁜 곳들이 눈에 들어온다. 출판 단지답게 카페들도 균형을 염두해서 기획하고 만들어진 건지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곳들이 많았다.
작가님과의 대화 속에서도 주변을 계속 살피고 있었고 걷다가 우연히 시선을 끄는 건물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한쪽 벽면 전체를 완전히 덮고 있는 담쟁이넝쿨을 바라보며 자연의 미와 여백도 없이 가득 채워진 그곳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있을 때 작가님이 말씀하신다.벽면 전체를 꽉 채워 덮고 있는 것이 보기에는 예뻐도 오히려 집과 건물에는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일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호기심을 자극한 담쟁이넝쿨이 오늘 사유의 매개체이다.
사실 내 눈에 들어온 건 벽면 전체를 가득 덮고 있는 담쟁이넝쿨의 규칙성과 그 규칙성에 따른 기울기만이 들어왔다. 기울기가 평행으로 보이는 수많은 넝쿨들의 분산된 정도와 그것들이 이루는 규칙성과 대칭성에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어쩌면 그렇게 정확한 거리만큼 평행이동을 할 수 있었을까 감탄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또한 그 담쟁이가 잘 뻗을 수 있게 도와주며 담쟁이 아래에서 제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있는 벽면까지.
담쟁이넝쿨의 버팀목으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한 벽면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이 머무른다.
'벽'은 나에게 이중적 의미로 다가온다.
하나. 벽은 나를 타인과 구분 짓는다. 구분 짓는 것뿐만 아니라 확실히 나눈다. 벽은 나를 외부로부터 차단한다. 그와 동시에 외부의 모든 정보의 유입을 차단한다는 단절의 의미이기도 하다. 가끔 가까운 가족이나 맘이 통해야 할 사이에 이런 벽을 느낄 때는 삶 속에 들어있는 많은 것이 통증으로 다가온다. 지금 현재의 벽은 부정적 의미가 커져서 차단하기도 하고의도하지 않게 반사되기도 하며 단절시키기도 한다.
둘. 벽은 외부로부터 나를 지켜준다. 벽은 이물질이나 강하게 다가오는 외부 환경으로부터 나를 방어해 준다. 방어벽은 때론 한결 같이 같은 자리에서 보호해 주기도 하고 나쁜 빛을 차단해 주기도한다. 복잡한 흐름을 흡수해 주고 반사하기도 하며 적절한 조절을 해서 균형을 맞춰 준다.
'벽' 하면 가장 먼저 엄마가 떠오른다. 엄만 나에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벽과 같은 존재였다. 위에서 언급한 거처럼 벽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론 전자의 의미도 있겠지만 세상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자식들에게 후자의 의미가 더 강할 거라고 본다. 내 의지가 과연 몇 퍼센트였는지 그 이전의 자아는 확인하고 들여다볼 수도 없지만 부모님 사이에 내가 태어났고 무의식 속 어머니 원형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엄마는 나에게 항상 '벽'이 되어 주었다. 물론 긍정적 의미가 강하다. 엄마는 항상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역시 엄마는 지지대 역할을 한다. 이젠 나 보다 물리적으로 경제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힘이 없어지고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그 고독함 속에서도 엄마는 자식을 지키는 무한의 방어벽이다. 담쟁이넝쿨이 벽면을 가득 덮고 있는 거처럼 엄마는 자신의 물리적인 많은 것과 애정의 마음을 다 쏟아부었다. 살아 숨을 쉬는 한 맘 속의 그녀는 지금도 한결같이 나를 지켜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 방어벽은 말없이 나를 지지하고 응원하며 지켜줬다. 그리고 영원히 함께 할 거라는 믿음으로 그녀의 영생을 바랐던 적이 있었다. 맘속으로 조용히 기도하며 그 시간을 기대했었다. 내 맘이 편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염원 속에 이제는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천천히 큰 그림자처럼 뒤따른다. 나에겐 언제나 천하무적이며 무한의 방어벽인 엄마는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늘 함께하며 엄마라는, 부모라는 가치의 의미를 알게 해 줬다. 그래서 이젠 소멸에 대한 두려움은 잠시 접어 두려고 한다. 놓아두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