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아주 편안한 죽음이란_비움(-)과 채움(+)

죽음과 상실감

by 무 한소

폰 메시지 알림이 부지런히 울린다. 아~오늘은 수업 시작 전에 알림음을 무음으로 전환하는 것도 잊었다. 무음으로 되어 있는 것을 소리로 전환하는 것은 늘 깜박하곤 해왔다. 하지만, 일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지켜왔는데... 역설적 깜박임은 요즘 일상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일들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라는 핑계를 대본다. 어쨌든 수업에 집중하겠다는 맘으로 소리 끄기를 하려고 급히 핸드폰을 들었다. 아주버님께서 가족 전체를 초대한 채팅방이었다. 메시지가 간결해서 전달하신 내용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이 몸속 필수요소인 듯 얼마 전 아버님의 몸속 폐에 확실하게 자리 잡은 암세포는 뻔뻔스럽게도 자신의 영역을 점점 빠르게 확장하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그것의 행태를 발견한 지 길지 않은 시간 그 나쁜 암세포가 온몸으로 퍼졌다. 현재의 시간과 괴리가 있었던 그 상황이 현실로 와닿자 무너지는 듯한 심장의 움직임과 아픔과 아쉬움을 남긴 그의 마음이 온몸에 전율로 퍼졌으며 그 후유증은 알림을 끄고 난 뒤에도 신경을 온통 그곳에만 머무르게 했다.




시몬 드 보브아르의 《아주 편안한 죽음》을 읽어내며 이젠 좀 다른 시선에서, 그리고 단단함으로 죽음을 볼 줄 알았다. 서로에게 편안한 죽음이 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노력은 그 무엇도 준비된 게 없다. 감정수업은 단지 학습으로만 끝나버린 걸까? 죽음을 아름답고 숭고하며 경이롭게 받아들이기에는 아직은 그녀의 감정의 결이 지나치게 주변의 온도 습도 등 변화에 민감하게 휘둘리고 있었다. 아니 때로는 무례하게도 감정이 앞서 가서 일을 그르치게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아버님을 뵌 처음 모습을 기억하는 건 상견례에서 일까? 그렇다. 아이의 기억이 이토록 명확하지 못한데 아버님께서 아이를 본 기억의 조각은 과연 존재하는 걸까? 300ps밖에 안 되는 퍼즐이라도 그분의 지금의 건강상태로는 그 조각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겠지만 아이가 '상견례'라는 퍼즐 조각을 기억하는 건 2년 전 이 세상과 단절이 된 아이의 아빠가 아버님을 참으로 좋아했던 기억 때문이다. "사장 어른께서는 참 점잖으시지만 유머도 있으시고 가끔 뵙고 담소도 나누고 술 한잔 하면 정말 좋겠다."라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 하지만, 이후 두 분 사이에는 과연 몇 번의 만남이 있었을까? 과거 속으로 들어가 보지만, 최근까지 겪고 있는 그분들의 과거 어느 시간으로 깊이깊이 가 봐도 그들에게 삶의 의미나 가치는 무엇이며 어디에 두고 있었는지? 안타까움만이 남아있다. 그분들은 당신들을 사랑하는 법을 아셨을까? 그분들도 그 시간에 맞춰 삶의 가치나 의미를 부여하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오셨으리라. 지금의 우리들의 시선에선 그분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노력을 하지 않은 거처럼 보이는 현재의 맘이 안타깝기만 하다.




결혼식 때 뵌 아버님은 백일홍처럼 단단해 보였다.

백일 동안 붉게 핀다는 백일홍이 왜 아버님의 모습 안에 오버랩되어 비쳤는지 그건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활짝 웃으시는 미소가 수줍지만 씩씩하고 따뜻했다. 국화과에 속하는 백일홍은 그런 꿋꿋한 모습이다. 어버이의 사랑이 그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에 단단해 보이는 아버님의 외모는 붉은색을 연상케 했지만 어버이의 모습을 상징하는 따뜻하고 큰 마음이 느껴졌던 거 같다. 이상하게도 아버님을 뵈면 외모와는 대조적 이게도 그 선명한 붉은 빛깔의 백일홍이 항상 생각나곤 했었다. 내면과 내부가 다 채워진 거처럼 단단하지만 여린 감성이 두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쉬운 건 아이의 아빠와 아버님, 두 분 모두 당신들의 맘을 한 번도 제대로 표현하거나 삶을 돌아보는 여유를 가진 적이 없었던 거 같다. 적어도 아이의 시선에서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는 맘과 아버님께서는 참 행복한 분이시구나라는 이중적인 시선으로 아이는 자신의 자리에서 한걸음 떨어져서 어젯밤 만찬의 시간을 회상해본다. 어젯밤 이야기는 아버님의 마지막 생신 만찬이 될지도 모를 시간이었다.


음식은 삼 남매가 각자 조금씩 준비해 오기로 했는데 부지런히 준비한 뒤 도착한 그곳에는 정말 많은 음식과 그 이상의 사랑이 존재해 있었다. 고모님 내외분, 형님과 아주버님, 우리 부부 그리고 8명의 손주들과 아버님 어머님까지... 모두들 정성 들여 저녁 음식을 사랑의 마음 이상으로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었다. 가족 모두에게 깊은 내면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사랑의 감정으로 존경을 전달해 본다. "감사합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본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반성해야 할 것과 정말로 중요한 우선순위가 확실하게 정리되는 거 같다. 그 무엇이 중요하랴, 따지고 돌아보면 감사한 것뿐인 세상에, 욕구를 거두고 나면 나누고 베푸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정성스럽게 준비해서 우리는 모두 저녁식사를 잘 끝냈다. 그리고 생일 케이크를 자르고 생신을 축하드리는 시간 아버님께서 담고 있었던 맘을 조금 여셨다.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야. 자식들 손주들까지 한자리에 이렇게 모여 있는 걸 보니 지금까지 참 잘살았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연거푸 고맙고 또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모두 눈시울이 붉어졌고 아이는 감정이 진정이 안되어 잠시 자리를 피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단절일까? 삶과 죽음의 경계는 무엇일까? 두려움은 죽음에 직면해있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지켜보는 가족이 더 큰 거 같다. 두려움보다 더 큰 건 죽음 이후에 찾아오는 주변인들의 상실감이라고 생각된다. 삶과 완전한 단절에 대한 두려움에서는 그 누구도 괜찮다거나 덤덤해할 사람은 없다.




아이는 아빠의 죽음이 참 외로웠고 떠나는 길에서도 쓸쓸한 고독이 연상되어 자식으로 겪는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이에게 그 죄책감은 상실감보다는 훨씬 큰 것이었다. 그때의 상황과 오늘의 저녁 만찬으로 보여준 가족들의 사랑을 비교하자면 '아버님은 참 편안해 보이고 행복한 분이시구나!'라는 맘에 든든해진다. 또한 그 마음이 죽음에 대한 아이의 아픈 기억들과 무거운 맘을 잠시 지워주고 무뎌지게 한다. 이제는 아버님의 몸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암세포의 아주 작은 배려로 통증이 조금이라도 덜 하시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이제는 아이가 끝도 없는 긴 터널에서 빛을 찾아 다시 나오기를,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감정도 벗어나기를 고대한다. 아파트 창밖으로 보이는 무채색의 세상이 자신의 고유색을 찾아갈 때쯤이면 아이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벗어나 주변 상황과 변화에 따라 감정이 휘둘리지 않고 차분히 고유성을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리고 오늘 다시 되뇐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