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너와 나의 삶을 요약해 보자면(-)

삶이라는 축제 이후 맺음을 준비해야 할 우리의 자세

by 무 한소

"이 상자는 조금 작을 거 같은데..." 사다리 위에서 상자를 꺼내며 남편이 얘기한다. " 잘 접어서 정리함 되지 않을까요?" "아니야. 내 생각에는 작을 거 같으니 다른 것들도 가장 먼저 고른 상자 사이즈에 맞춰야 할거 같아." 신년회 준비에서 선물을 포장할 상자를 고르던 남편과 M의 대화중에 가족 톡의 알림이 울린다.


2022년 가족들 간의 신년회를 하자는 의견을 올린 건 이쁘게도 조카들이었고 그것을 더 끈끈하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획, 설계한 그녀가 맨 앞에 있었다. 몸이 안 좋은 할아버지와 가족 간의 침체되어 있는 분위기를 조금은 밝게 풀어 보고자 하는 마음과 기억에 남을 순간을 포착하고자 하는 의도도 숨어 있었다. 할아버지께 이제 얼마 남지 않는 시간 안의 '가족의 사랑'이라는 가치를 선물하고 싶었던 걸까? 아버님께서도 예측하고 있는 거처럼, 우리 모두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짐작하고 있다. 그녀가 M이 속해 있는 세대를 대신해서 그렇게 계획하고 진행해 나가는 부분이 이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감사한 맘이 컸다. 그녀의 계획 중 일부로 들어가 있는 선물 전달하기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며 가족 한 명 한 명을 떠올렸고 랜덤으로 전달될 선물에 마음을 온통 쏟으며 카드도 한 장씩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그리고 카드 마지막에 "나의 가족님 ♡ 사랑합니다"를 잊지 않았다. M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 그러했다. 가족애가 더 살아나서 나눔이 사랑을 극대화한 듯 따뜻함이 넘쳐흐른다.




아버님께서 건강을 잃은 후 최근 M의 가족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서로에 대한 애틋한 생각 나누기와 더불어 M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가짐, 자세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첫 번째 나타난 반응은 견디기 힘이 들어서 감정표출 에만 정신없이 충실했다면 두 번째는 '멍'을 하기 시작했고 그 '멍'이 확산되어 일상생활을 하기 조금씩 힘들어졌다. 무엇보다도 매일 얕은 잠 속에서 헤매다가 가끔 깜짝 놀라며 깨어나곤 했다. 두 번째 단계를 벗어나서 세 번째로 찾아온 건 그 과정들 이후 죽음을 아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삶의 건너편에서 항상 함께 하고 있는 죽음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거나 바라보지 않으며 삶과 꼭 붙어 다니는 것이 죽음이라면 살아있다는 건 언제나 죽음 앞에 직면해 있다는 의미이다. 삶과 죽음은 평행선의 위치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함께 한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평행선은 만날 수는 없지만 '삶과 죽음'은 좀 특별한 관계처럼 보인다. M이 알고있는 보편적으로 생가하는 평행선의 관계와는 다르게 죽음과 가까워진 '삶과 죽음'에서는 교차점이 생긴 것이다. 그 접점은 과연 죽음쪽으로 가까이 갔을 때만 보이게 되는 걸까?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경우로 죽음을 이젠 좀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죽음에 대한 생각도 마음도 아픔으로만 바라보고 그때의 감정을 견디기 힘들어했던 처음과는 확연하게 차이를 보인다.


죽음에 대한 태도가 변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지금 당장 내 앞에 놓인 운명을 더욱 확실하게 사랑하게 된 것이다. 내 앞에 놓인 삶이 더없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니 그 결과 이 순간을 즐기고 내게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게 된다. 또한 건강을 잃은 후 깨달은 우리의 삶은 죽음 차체라는 것이다. 삶이 죽음과 맞닿아 있으니 지금 순간이 가장 소중하며 내게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고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순간 우리는 죽음 앞에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들의 삶을 요약하자면 카르페 디엠(Carpe diem), 아모르파티(Amor fati),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을 실천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나 또한 자유를 꿈꾸며 위 세 가지를 지금부터의 내 삶과 함께 기억할 것이다.




신년회 준비를 하며 가족들 한 명 한 명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가족이라는 것은 이토록 가슴을 뜨겁게도 하고 가끔은 한겨울 계절을 거슬러 가는 패션감각으로 온도를 감지하지 못해 체온이 점점 떨어지는 거처럼 냉랭해지기도 하고 하염없이 그리워지기도 하며 다시 마주칠까 두려움이 도사리게 되기도 한다. 누군가 말했던가? 애증의 관계라고... 하지만 가족 간에는 애증 중 '애'가 더 크게 자리하고 있기에 조금 불편하거나 아프더라도 스스로 행하게 한다.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실행하게 한다.


각자 집에서 가족들을 생각하며 함께 나누고 싶은 음식 한 가지씩도 준비했다. 마음은 벌써 사랑의 빈 공간을 꽉꽉 채우듯 준비가 끝났다. 선물 포장과 손글씨로 된 카드와 또 손수 준비한 음식까지...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랑의 충만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자 따뜻하고 뿌듯하다. 그런데 신년회가 있을 예정이었던 토요일(1월 1일) 오전 가족 단톡 창의 알림이 울렸다. 아버님께서 몸이 많이 안 좋으신지 조용히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고 곁에서 편안한 시간을 가지며 차분히 신년을 보내자는 안타까움이 담긴 아주버님께서 전달하신 전체 공지였다. 문자를 확인하자 곧 마음이 다시 가라앉는다. 아버님께서 세상과 정리해야 할 시간과 역으로 가족들도 아버님과의 맘 정리를 천천히 해야 할 시간이 된 것일까? 삶은 무엇일까? 삶에 속해 있는 우리는... M이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편안히 받아들이게 된 것도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통증이 점점 심해졌지만 아버님께서는 가족들에게 그 모습을 감추신다. 가끔 에너지 공급이 음식 섭취나 약물로도 전혀 안되어 의식이 흐릿해지셨을 때를 바라보면 그렇게라도 자식들에게 잠시 기대어 주면 맘이 덜 안타깝다. 몸을 뒤척이실 때 아버님을 찾아온 통증이 얼굴 표정으로 드러나지만 신음소리 한번 크게 내시지 않는다. 갑자기 그 모습을 지켜보던 M은 무너지며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본다. 그리고 문득 과거에 읽었던 [타인의 고통_수잔 손택]이 생각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공감을 가장 크고 가치 있는 역할로 보며 우리의 대처로 수 있다. 아픈 가족을 지켜보는 입장에서 극단에서는 공감의 한계에 다다르게 되며 그것 또한 M을 혼란에 빠지게 했다. 아버님의 고통스러운 그 모습을 보고 짧은 시간 감정이입으로 아픔을 함께 나누었지만 그건 잠시 뿐이다. 감정 동요는 아픔이 직접적으로 와닿아 그 맘을 함께 나누고 가족들이 아버님의 아픔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은 감정일 뿐이라는 거다. 그리고 감정은 사람에 따라서 더 깊고 얕음이 다르므로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건 감정으로만 온전히 느끼고 나눈다는 것에 안타까움이 따른다. 감정이 더 큰 사람은 점점 깊어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맘을 잠시 공감하다 조금씩 단절에 이르게 된다.


폐암이 진행될 대로 진행되어 암세포가 온몸에 퍼져서 통증은 이루 말할 수도 없다. 그 고통을 아버님 혼자서 온전히 겪어야 함을 지켜보며 결국, 삶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 1인으로 혼자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려주고 그 깨달음이 씁쓸 할 뿐이다. 그것 또한 지켜보는 타자의 입장일 뿐이고 고독하고 쓸쓸해 보이는 것도 M을 포함한 가족의 입장일 뿐인 것이다. 통증에 의한 아버님의 고통은 감정으로만 나눌 뿐이지 함께 할 수도 없고 아픔을 덜어 줄 수도 없다. 가끔 몸을 뒤척뒤척 움직이고 가쁜 호흡을 하며 눈을 깜박이고 최소한의 배변을 하기 위해 섭취해야 하는 음식물을 거부하시거나 목 넘김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면 정신은 혼미해지고 의식이 생각이나 마음 구석 저편에 자리 잡는다. 아버님은 그렇게 아주 가끔은 지켜보는 타자에게 온전히 몸을 맡기곤 한다. 그리고 많이 힘들어하신다. 그땐 그게 통증인지 의식인지 직관인지, 감정도 생각도 중앙의 한가운데 서 있다. 절대 안 하겠다고 다짐한 낯선 새로운 경험이지만 최후엔 이유도 모른 체 감정과 생각의 한가운데 서 있게 된다.


당신이 놓아 버릴 수밖에 없는 최후의 수단인 지푸라기를 놓친 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