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다시 내게 찾아온 상실감은 모양도 냄새도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무게감이나 온도, 습도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급격하게 하락하고 있는 그것을 그저 쳐다본다. 급격하게 떨어지는 속도를 느끼고 있을 뿐이다. 위에서 내려온 끈을 잡고 의지해서라도 잠시 비상하는 모습을 보며 응원해 주고 싶은데... 무기력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깊은 감정적 상실감보다 겉 껍데기인 육체가 더 힘이 빠져서일까?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한 시간이 얼마 전까지 한동안 자신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시간의 감정들은 따로 다른 체험 없이 나를 성장시키고 발전하도록 돕는 모습이었을지 모른다. 그때의 난 그곳에서 빠져나오지못하고 허우적대고 있었다. 글을 쓰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이제 겨우 그것으로부터 한 발짝 벗어 나왔다. 그런데 오늘 또 다른 모습의 상실감이 짓누르기 시작한다. 크기는 대단하다. 구체적으로 모습이 보이지는 않지만 짓누르는 압력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크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삶을 살아간다는 건 그것 자체만으로 끝도 없는 상실감과 싸워야 한다. 가끔은 이겨내고 받아들이기도 해야 한다. 대부분의 무기력하거나 상처에서 오는 상실감은 글을 써 나가며 비우고 버리기를 통해 해소하고 다시 바로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따뜻하게 안아 주었던 글들이 다시 상실감에 빠지게 했다. 어쩌면 온몸으로 써 왔기에 상처가 더 큰 것일까?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휘둘리는 감정이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다른 글을 읽어가며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더 큰 상실감이 자신을 괴롭힌다.
오만하고 거만한 자신을 제대로 보고 있는 걸까? 도대체 내 감정은 왜 항상 이성보다 빠르게 움직이며 자신을 괴롭히는 걸까? 무례하게도 감정은 노력과는 상관없이 또다시 자신을 아프게 하고 울린다. 아직은 새내기 풋내기인 작가 생활에서 그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 걸까? 누군가처럼 하루아침에 크라우드펀딩을 통해서라도 빛이 나기를 바랐던 걸까? 스스로 풋내기라서 기대하지 않는다고, 아직 새내기라서 기대하는 맘을 품는다는 건 욕심이라고. 거만한 이성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보장된 예의는 앞으로의 인내의 시간을 더 기다리게 한다. 하지만 그렇게 위로하고 달래 왔던 이성과는 달리 감정은 지나치게 사건과 환경에 휘둘린다. 또 흔들리며 요동치고 있었다. 이내 무기력한 에너지가 선물한 답답한 마음까지도 찾아왔다. 그리고 그건 다시 상실감에 이르는데...
지금까지의 삶을 살아오며 수많은 상실감을 경험했다. 경험을 통해 좀 더 쉽게 일어나기도 했으며 주변을 볼 수 있었다. 때마다 들이닥친 상실감의 모양과 색깔을 구분할 수 있었고각기 다른 무게감도 감지했다.
사람은 이중적 이게도 태어나면서부터 동시에 죽음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그 출발점에 서게 된다. 삶은 우리를 죽음 안으로 끊임없이 내몬다. 주변인의 죽음에서 오는 상실감만큼 크고 무겁게 우리를 짓누르는 것은 없을 거라 생각해 왔다. 지금까지 나에게 접촉해온, 다가온 상실감은 모두 비슷한 양상이었다. 하지만 반복적 실패나 포기를 배워야 하는 사람에게도 비슷한 상실감의 크기와 무게가 느껴진다. 이번에 찾아온 상실감의 근원은 무엇일까? 결과는 '낙하'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향하지만. 뭔가 확신이 있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은 지극히 현실적이지 않기에 발생되는 모순일까?
희망고문이라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스스로 포기해야만 살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던져본다. 희망고문... [죽음의 수용소에서_빅터 플랭클]를 읽어 나가며 희망고문이 사람을 얼마나 지치고 힘들게 하며 결국 병들게 하고 죽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의 우리의 모습도 닮아 있지는 않을까?
지금 느끼는 무기력한 상실감은 현재 자신과 감정적으로 닮은 타자들도 비슷하게 겪고 있다. 어떠한 도전의 연속적인 삶 앞에서는 누구나가 비슷한 경험을 하리라고 생각한다. 단지 누군가는 답답한 상실감을 안개가 걷히듯 걷어내고 일상적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과 같이 참으려는 무게에 짓눌려 벗어나지 못하는 누군가도 존재하리라.
이제부터 상실감에 대처해야 할 나의 자세는 무엇일까? 지극히 감성적이지만지금부터는 주변 눈치를 살피는 감성을 좀 더 다독이려고 한다.
원뿔 모양의 상실감과 삼각뿔, 사각뿔 등 각뿔 모양의 상실감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부피와 양으로 감히 비교할 수 없다. 부피의 안치수와 겉 치수가 대략 같다고 보았을 때 무게 또한 같은지 비교할 수 없다. 그 속에 들어가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수분의 양 들이의 크기도 비교할 수는 없다. 상실감은 다른 모양으로 각기 다르게 표출되었을 뿐 어떤 것이 더 크고 무거운지는 알 수 없다. 삶의 중요성이나 가치를 점수로 매길 수 없는 거처럼.
상실감은 결국에는 온몸으로 감당해야 한다. 온전히 심하게 앓고 겪어야 비상의 한 계단을 제대로 오를 수 있라고 본다. 급격히 낙하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부딪혀야만 좀 더 급한 기울기로 높이 비상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