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를 보내는 그 순간 울고 있는 사람들의 행렬을 따른다. 행렬 속 스스로 가둔 굴레 안에 자신의 모습이 쓸쓸히 비친다. 소리는 점점 커져서 울음까지도 집어삼켰다. 울고 있는 자신이 주체인지 울음소리가 스스로 주변을 지배하며 움직이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순간 어떤 것이 떠올랐을까? 정지된 것 같은 찰나에도 끊임없이 계획한다. 스스로. 어떻게 울어야 하며 사건이 일어난 순간에 무엇을 떠올려야 할지. 심지어 팔은 어떤 순서로 움직이며 발걸음은 어떻게 떼야할지 천천히 계획한다. 깊은 슬픔과 울음 뒤 감정에만 지나치게 휘둘린다. 자신을 잡아준 이성이 매정하게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가끔 소스라치게 놀란다. 스스로 의지가 되기도 하고 두려워지기도 한다. 감춰진 이성이 순간순간 감정에 휘둘리는 자신을 어떻게 구해낼지.
결혼해서부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가볍게 부딪히며 끊임없이 경험을 쌓았다. 땅속에 묻히는 순간의 정의로 묻힐 망자를 대신한 절박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죽음을 직면한 우리 앞의 마르고 힘이 없는 가엾은 사람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걸까? 망자의 고독이 지나치게 쓸쓸하고 외로움이 느껴졌다. 이어서 더 이상 울음을 참을 수 없을 만큼 슬픔이 깊어진다.
여기 스토너가 울고 있다. 이곳에서는 스토너만이 주검이 된 고독한 슬론 교수를 위해 유일하게 울어준다. 아직은 삶이 얼마만큼 외롭고 고독한지 모르는 스토너에게 슬론의 고독은 높낮이의 깊이보다 훨씬 더 깊은 외로움과 쓸쓸함을 전달했다. 땅 속에 묻히는 순간 슬론의 철저한 외로움은 스토너의 뻣뻣하고 덤덤한 감정을 무너뜨렸으리라. 불과 얼마나 지났을까? 스토너는 자신의 죽음을 맞이한다. 온몸에 암이 퍼져 이제 혼이 빠져버린 육체만이 그를 지켜내고 있었을 때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본 주변이 보인다. 주변의 소리는 단지 울림으로 돌아올 뿐이다. 울림은 하염없이 환청으로 돌아온다.
그는 아프기 얼마 전 젊은 시절을 회상했다. 그 시절의 어색함과 서투름은 아직 남아있는 반면 우정을 쌓는데 도움이 될 솔직함 그리고 열정의 에너지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긴 삶의 여정 속에 곳곳에 펼쳐진 고속도로나 터널을 통과하면서 지불한 승차권 가운데는 열정 에너지와 솔직함은 이미 지불된 것이었을까? 성숙된 면모와 다급하지 않는 마음은 지불하고 거슬러 받은 감정이라고 짐작해 본다.
여기 J가 자신의 몸을 지탱하기도 힘들어한다. 이제 자신을 집어삼킨 울음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울음은 스스로 늪에 빠졌고 슬픔을 더 진한 농도를 만들어 냈다. 깊은 곳의 짙은 농도가 그를 끝내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의 울음은 망자를 향한 아련한 연민이었을까? 다하지 못한 효에 대해 스스로 갖고 해소되지 않은 인정 욕구 일지 모른다. 그의 일부가 망자를 쫓으며 혼과 만나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고온의 화장까지 쫓게 될까, 그래서 그 혼을 놓아주지 못할까 봐 염려스럽다. 그는 슬픔이 짙은 그곳에서 여전히 나오지 못하고 있다.
스토너의 삶과 J의 삶 그리고 나의 삶은 제각각 다르다. 우리의 삶에서 비치는 신념과 단순한 의지, 소명과 의무, 영향력의 유무, 지위와 공간 속에 끼어 들어가 있는 자리, 급변하는 주기, 천천히 완만하게 변화하는 주기... 우리의 삶은 모두 다르다. 과연 누구의 삶을 표본이라 할 수 있을까? 너무나 다른 스토너와 J의 삶에서 나의 삶, 우리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감춰 두었고 종식된 줄 알았던 감정들은 삶의 시간을 타고 천천히 숨을 쉬러 나온다.
스토너의 삶은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삶이었을까? 그는 삶에서 책에 대한 태도 배움과 가르침의 자세만이 달랐다. 삶의 대부분을 관조하는 자세로 때론 회피하고 있었다. 우리의 삶도 그와 과연 닮았을까.
J의 삶은 적극적이다. 관조하는 자세가 아닌 삶에 직접적으로 뛰어든다. J 역시 시행착오를 겪어오며 자신의 감정도 보게 되고 시간 속의 노력으로 서툰 감정들이 차츰 성숙한다. 그리고 중년의 그는 스토너보다 좀 더 젊은 나이에 삶의 가치를 찾기 시작한다. 그래서 J는 스토너보다는 조금 더 이른 시간에 그 늪에서 나올 수 있었던 걸까? 황혼으로 가는 길목에서 좀 더 가까운 자리에서 J는 실천한다. 가족들 주변인들을 매 순간 사랑하고 아끼리라. 옆에 있을 때 정면으로 부딪히리라. 그리고 자신에게서 기대한다. 또한, 삶의 의미나 가치는 뒤로 하기로 한다.
한 생명의 탄생과 더불어 아니, 더 오래전부터 인류는 존재했다. 탄생에서부터 자의든 타의든 우리는 서로 관계 맺기를 시작한다. 그 범위 안에는 시간과의 관계도 들어가 있다. 시간과 공존하기보다는 시간 위에, 시간의 흐름을 타고 있을 뿐이다. 개개인의 탄생부터 죽음으로까지 삶의 시간, 체감적으로 느끼는 삶 속의 시간의 흐름은 그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진다. 어릴 때 우리는 대부분 언제 어른이 될까, 권리가 많아지는 성인의 삶을 마냥 동경해 왔다. 평행선 건너에서 함께 움직이는 책임은 보이지 않는다. 그때 체감으로 다가오는 시간의 속력은 하루가 일주일인 듯 느꼈으리라.
중년 이후에는 역으로 일주일이 하루 같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죽음에 직면했을 때 체감으로 느끼는 시간은 그 빠르기가 어느 정도 일까? 체감의 시간은 지나온 거리보다 남아 있는 거리는 얼마 없으며 속력은 점점 빨라지기만 한다. 갑자기 조급해진다. 스토너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안에서 마무리 지어야 할 것들을 끝낸 거처럼 우리는 자신의 탄생에는 의지가 미미했다. 하지만 마무리라는 단어가 포함되는 죽음에는 조급한 마음과 그럼에도 반드시 정리해야 할 것들이 있다. 마무리 중에 스토너가 던진 것처럼 나는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기대했는지 묻고 싶다.
스토너는 삶의 마지막 시간에 비록 읽을 수는 없었지만 조금 쌓여 있는 책들이 힘이 없는 손끝에 닿자 그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는다. 그의 편안한 죽음 가운데서도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그는 과연 무엇을 기대했는지 편안하게 돌아본다. J에게도 질문을 던져본다. 당신은 당신의 삶에서 뭘 기대했는지.
반복된 질문 속에서 물음표로 꼬리를 물고 돌아온 답은 그래도 삶은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삶은 살아야 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