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을 앞둔 며칠 전 간만의 여유를 누리게 되었다. 여유란 일상에서 늘 내게 다가 오지만 스스로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여유는 자신의 선택인 것이다. 그 선택으로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맘 그득한 여유를 누렸다.
새벽부터 읽고 있었던 책을 아침 준비로 잠시 미뤘다. 아침식사 후 마치 누군가가 나를 급히 부른 것처럼 스토너가 기다리고 있는 그 속으로 다시 부리나케 뛰어들었다. 스토너는 여전히 침착하게 자신을 내보이며 나를 강하게 그가 있는 세계로 끌어들였다. 그의 움직임과 함께 얼마나 나갔을까? 재독에서다시 만난 책은 항상 처음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는 그의 많은 것에 침잠된 나를 돌아보자 갑자기 목 넘김이 필요해졌다. 이왕이면 향이 가득한 커피를 마셔야겠다. 다짐 후 견딤에 익숙하고 덤덤한 스토너를 남겨둔 채 캡슐커피 한잔을 내리러 커피 머신 앞에 복잡한 감정을 담고 서있다. 같은 자세로 머신을 바라보는 내 눈에서는 여러 사연으로 스토리를 짜낸 것도 아닌데 갑자기 일상에서 시작된 슬픈 연가가 그려지며 숨결 속에 녹아있던 사연들이 떠올라 눈물이 흐른다. 인간의 마음에 감사함이 넘쳐흐르듯 그것이 더 이상 잔잔하고 잠잠한 운율로 머무르지 못하고 파도와 같은 그 감정이 나를 감싸 안으며 덮어버린 걸까? 불이 깜박이는 커피 머신에 포레스트 캡슐을 하나 넣고 멈추어진 빛을 확인한다. 마치 카운트 다운을 하듯 흐르는 눈물을 멈추고 숨을 죽이며 내 의지를 강하게 실어내듯 찾아온 숲 속 이곳에서담아낼 커피를 검지 손가락에 힘을 주고 확실하게 누른다.
거대한 소리와 함께 퍼지는 숲 속 향기가 소음이 아닌 자연의 소리와 향을 연상케 했다. 그렇게 내려져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잔잔해진 머신이 대견하다. 커피는 크래머가 그득해서 적당히 고소한 풍미를 보이고 맛과 향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거대한 소리 이후 잠잠해진 숲 속에서는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경치가 선물처럼 찾아왔다. 커피잔을 들고 햇살이 내비치는 거실 쪽으로 몇 발짝을 천천히 옮기자 길게 뻗은 가는 여러 갈래의 빛이 머무른 저 자리에서 안내하는 멀리 아득히 북한산까지 보이는 게 아닌가? 진정시켜 두었던 감정이 다시 쏟아져 나오듯 벅차오른다.
지어진지 17년이나 지난 오래된 아파트의 이 자리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감사한지... 이곳에서 가끔 주변을 돌아보고 자연을 바라보며 글감이 떠오르는 순간이 감사하다. 같은 자리 한 공간에서도 매번 감정이 다르듯이 가끔은 뷰가 좋아서... 우리 동으로 이사 오는 건 다른 건 볼 건 없겠지만 뷰가 정말 좋아라고 주변의 말들을 흐르는 인사처럼, 지나가는 행인들의 수다처럼 여겨 왔었다. 그런데 오늘과 같은 벅찬 감격을 느낀 날은 다르다. 가끔 거실에서 커피 한 잔을 들고 탁 트인 자연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다 뻥 뚫리는 거 같아... 쯤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에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 이상으로 행복하다! 감사하다!라는 벅찬 마음에 눈물까지 흐른다. 변화의 일부일까? 어떤, 무슨 변화일까?
우리는 삶을 살아갈 때, 같은 선택과 방향 속에서도 매번 그때의 마음가짐은 달라지며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니체가 강조한 내 앞에 바로 닥친 운명을 사랑하라는 전달 역시 나를 조금씩 변하게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내 눈물은 스토너에게 받은 응축된 감정을 눌러 놨다가 또 가둬 뒀다가 맘껏 끌어올린 것과 같다. 그는 나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진다. 그리고 조용히 토닥인다. 내 걸음이 승자의 삶도 패자도 삶도 그렇다고 화려한 삶도 아니며 그 어떤 삶이나 스토너처럼 인내하는 수수한 삶에서도 우리 모두에게 전달된 삶의 마지막 질문은 다 같다고... 그는 당신은 당신의 삶에서 뭘 기대했는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반복해서 물어온다. 그 울림이 얼마나 큰지 자연을 바라보며 벅찬 환희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오늘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게 귀하게 찾아온 몇 시간의 자유에서 주변이 보였고 그 시간의 환희를 깨달았으니 감사함에 가슴이 활짝 열렸다.또한 그 순간의 감사함이 나를 다시 자연으로 이끌었고 조금 떨어진 먼발치의 거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볼 수 있는 지금의 좌표야 말로 우주 안, 지구 안의 나의 자리라는 깨달음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