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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소진

야성의 또 다른 부름은 끊임없이 회자되는 삶이다.

by 무 한소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나보낸 이후 여러 날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자신을 눌렀다. 그때는 다듬어진 거처럼 보였지만 완성되지 못한 감정으로 힘이 들었다. 주변에는 처리되지 않고 남아있는 복합적 감정과 깊은 저편으로부터의 울림이 함께했다. 나의 감정은 나의 것이기에 책임도 감당도 항상 혼자서 마무리 지어야 했다. 20여 년 전 모든 것이 너무나 미숙했던 자신이 아픔의 감정을 정리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던 시간들, 그 속에는 더 부족한 경험들이 있었다. 그때 감정 정리를 최소한으로 다독여주는 한 사람만 있었더라도. 좀 덜 아프고 침체되는 시간의 주기가 짧을 수도 있었을 텐데... 혼자서 이겨내려 애썼다. 가면을 쓰며 단단해지고 있는 척 내면을 드러내지 않았다. 온전히 마무리되고 감정을 잘 추스르는 거처럼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때론 선으로 가끔은 악으로 거짓말을 한다. 선한 거짓말은 자신이 병들고 있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악한 거짓말은 상대에게 상처와 아픔을 전달하곤 한다. 그래도 되는 것처럼 우리는 선한 거짓말을 한다. 자신은 앓고 병들고 있으며 극단적인 결과가 초래되기도 한다. 그것이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들에게 얼마나 무거운 아픔과 상처를 남겼는지도 잊은 채 선한 거짓말을 저지르곤 한다.


늪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있는 자신이 보인다. 정리하다 멈춘, 추스르다 만 감정은 미완성인 채 남겨둔다. 정작 껍데기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빠져나오지 못한 꼴이, 꼭 속이 비어있는 부럼을 깨뜨렸을 때 너무나 쉽게 부서지며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그때의 껍데기가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요동치는 모습에서도, 감정만을 품고 있는 이곳에서도 곧 무너짐, 깨어짐이라는 것이 찾아올까 봐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아버님을 떠나보내는 시간인 입관 때 얼굴과 몸을 충분히 만지며 접촉하고 얘기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마치 살아계시는 듯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과거 나에겐 아빠를 보내 드릴 때나 특히 아이를 떠나보낼 때 애착관계가 지나치게 커서 그랬는지 마지막 인사를 나눌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감정을 스스로 잘 다스리지 못하리라는 짐작으로 장례 절차 과정에서 딸과 엄마라는 자리에서의 존재를 대부분 빼버린 것이다.


현실에서의 사인의 원인과 이유는 항상 분명했다. 마음에서 죽음을 인정하든 못하든 아이와 아빠는 곁을 떠나갔다. 다시 한번 확인했지만 내 곁을 떠나 버렸다. 그때 정리되지 못한 감정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 생생하게 떠 오르고 연거푸 주위를 맴돈다. 시간이 지나면 차츰 옅어질 거라 생각했던 감정을 꺼내면 꺼낼수록 그동안 얼마만큼이나 짓눌렸는지 반듯하고 딱딱하게 다듬어진 듯 보인다.


콘크리트 벽속에 위장되어 잘 다듬어진 감정들은 착각하며 살아지고 있다. 살아내고 있었다. 특별한 사연이나 일을 경험한 후 그토록 잘 위장되어 있던 감정이 다시 콘크리트 벽을 뚫고 나올 줄은 몰랐다. 실타래를 풀어내듯 천천히 나온 감정들은 세세한 부분까지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제는 스스로 쏟아내야 할 감정을 토해내고 뱉어내며 울기를 반복한다. 자동차를 주행하며 연료를 다 소진한 거처럼 우울이나 슬픔의 감정이 다 소진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감정은 마르지 않는 오아시스와 같다. 반복된 과정 속에 이제는 다 쏟아내고 끝난 줄 알았던 감정들이 끝도 없이 솟아오르고 다시 육체와 만난다. 육체와 만난 감정은 다시 제 역할을 했던 거 같다. 충실하게...


매 순간 충실했고 책임감이 더해져 충분히 토해내고 울었다고. 소진되어 끝나 버렸다면 그것은 감정이라 불릴 수 없을 거다. 감정은 소진되고 그러면서 다시 생성되기를 반복한다. 감정은 이제 다시 준비하고 시작한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인류가 회자되는 삶을 반복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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