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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 한소 Mar 30. 2022

비움과 채움

배변만큼 중요한 감정 비워내기


며칠째 남편과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서로의 입장에서 주변을 보며 감정을 이어가는 게 쉽지 않다. 그의 시선보다 더 깊은 마음의 시선에서 무엇보다도 변하지 않는 세상을 바라보며 풀어나가는 방법이 나와 맞지 않다고 해서 시비를 가려내거나 내 것을 강요할 필요나 의무는 없다. 다만 이젠 더 이상 그의 세상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다.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의 세상에도 들어가고 싶지 않다. 가끔 이유 없이 소리 내어 울어버린다. 한번 터져 나온 삶에 대한 가치부여와 무의미한 대답이 한없이 나를 괴롭힌다. 남편과의 불편한 관계가 먼저 였을까? 형부의 사망 소식으로 먼저 시작되었던 걸까? 요즘 상태는 무기력한 듯 느껴지지만 누구보다 삶에 직접적으로 맞서며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감정의 골이 그렇게 깊게 자리 잡고 있었기에 바로 반응이 나타나는 게 아닐까? 쏟아져 나오는 울음에도 농도의 짙고 옅음이 있을까? 며칠째 무겁기만 한 감정의 농도는 디까지 깊어만 질지 답답하다. 끝은 어디인지. 과연 결승선이 있는 경기일까? 자신을 향해 다시 한번 묻는다.


각자의 세상에 머물러 있었는지 점점 깊은 늪에 빠져갔는지 며칠 동안은 서로를 스칠 때 쌩쌩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우린 서로 그 소리를 알아채고 감정에 귀를 기울여 주기를 기대했던 걸까? 일주일간의 시간이 지나자 깊어진 그 감정조차 무뎌졌는지 익숙하지만 무거운 감정을 살피고만 있었다. 살피며 무거워진 자신의 우울을 다시 들여다본다. 지금 내 삶과 앞으로의 내 삶에서 최선을 다해 해내려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처럼 무작정 감정 비워내기만을 하며 살아가길 원하는 걸까? 그래야 후련하고 시원하니까. 비워내기가 참 힘들었다. 음식을 섭취하고 영양이 필요한 곳곳의 기관으로 골고루 나눠 보낸 후 남은 것들은 내 몸의 지방으로 그리고도 남은 나머지는 배설을 해야 한다. 배설은 매일 규칙적으로 일정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내 몸이 건강함을 느낀다. 나의 배설은 장소를 이동하거나 마음이 좀 불편하거나 시간의 변화가 생겼거나 불규칙한 우연이라는 급작스러움과는 맞지 않다. 배설이 자연스럽지 못한 나에게 다른 힘든 한 가지가 감정 비워내기이다. 흡수가 빠르다. 아마도 감정이입도  빠른 흡수로 시작된다. 비워 내지 못했지만 차곡차곡 채우기가 시작된다. 그런 반복적인 일상이 바로 현재 감정의 포화상태를 만들었다. 아마도 지금 느끼는 두려움이 깔린 무기력 상태가 감정의 포화상태라고 생각한다.




남편과의 불편한 감정을 미처 정리하지도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그 감정을 이어가던 목요일, 정오 가까운 오전 동생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에서 뭔가 예견된 거처럼 미세한 떨림이 나를 괴롭혔다. 두려움이 느껴지자 받지 말까라는 순간적인 갈등까지 있었다. 그리고 동생은 미사여구도 없이 큰 매형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달받은 대로 그대로 전했다. 확인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나와는 좀 더 거리가 먼 사촌 중 어느 누구를 얘기하는 건 아닐까 하고 되묻는다. 그리고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언니의 남편인 나의 형부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한 꼴이 되었다. 형부 ㅇㅇㅇ... 너무도 아프다. 별세 거나 사망이라는 사연을 올리기엔 형부는 너무나 젊었다. 더 아픈 이유는 27년을 형부는 혼자 아팠고 현실 속에 약하게 연결된 네트워크 속에 가려져 단절되어 있었다. 그건 가까운 가족인 우리의 맘의 짐이고 언니의 삶의 무게였다. 언니와 형부의 행복하고 찬란했던 결혼 생활은 단 3.5년 그리고 아픔을 간직한 채 세상과 단절된 27년을 살았던 형부의 삶이 너무나 아프다. 곁에서 그 시간을 함께해온 언니의 삶은 더 아프고 안타깝다.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고 떠난 형부가 자유로워 보이고 좀 가벼워 보이지만 남은 자들의 감정은 좀처럼 정리가 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준 언니만이 감정이 정리된 듯 조금은 담담해 보였다.


형부의 시각과 사고에서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떤 색상을 지니며 무슨 향을 지녔을까? 얼마 전에 봄은 잔인하다는 글을 올렸었다. 또다시 봄은 나에게 잔인함을 선물했다. 형부의 사고에서 아픈 육체와 하루 종일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그리움은 자신을 얼마만큼 괴롭혔을지... 가슴이 먹먹다. 매일이 다르다는 것, 가끔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형부는 삶의 이유조차 없이 매일 살아가고 그것이 힘들었지만 느낄 수도 표현할 수도 없었을지 모른다. 깊은 늪에서 어 나오지 못하는 형부는 자꾸만 빠져들어 다. 결국 마무리에 가서는 자신도 앓고 타자들은 더 깊이 앓게 했다.

 

남편의 복잡한 회사 일정과 서로의 감정 정리 후 형부가 기다리고 있는 장례식장을 향해 새벽 공기의 위로를 받으며 바삐 움직였다. 주검이 되어버린 형부와 유족의 모습으로 언니가 기다리고 있을 장례식장을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남편과 우리 둘의 대화는 필요한 것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감정의 분위기는 나를 감싸고 있는 감정과는 다른 것이었지만 그도 인생을 돌아보고 있는 중인지 호흡의 깊이가 더 깊어졌다. 죽음을 한 번 두 번 세 번... 접하면서 결론은 명료해졌다. 삶은 몇 시간 안에, 얼마 되지 않는 절차로 매듭을 짓고 나면 이토록 단출해지고 간단히 정리가 되는구나! 또한, 스스로 되기도 하고, 하기도 하지만 비록 원하지 않아도 죽음은 망자와 세상을 단절시켜 버렸다.


형부의 삶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울었다. 형부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차마 형부를 볼 수는 없었다. 나의 용기는 거기까지였다. 내 양심은 바로 거기까지였다.  내 기억 속의 형부는 영정사진 속의 모습으로 그대로 남아있다. 목소리도 그때 그 시간 매일 전화를 걸어 인사를 하며 언니를 찾았던 높은 솔음으로 얘기하던 그 기억으로만 남아 있었다. 일상을 살아가며 내가 우선순위로 여기며 실천했던 것은 무엇일까? 형부는 죽음의 문턱 그 순간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 순간 어느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과 맞서 싸우거나 순응하며 그 안의 두려움이 얼마만큼 컸을지... 그 여운도 남은 자들에겐  짐이 되어 버렸다.  두려움 속에 죽음은 벌써 스며있었다.




이제는 쌓이고 쌓인 내 감정을 비워내려고 한다. 천천히... 지나치게 쌓여서 정상적으로 뱉어내지 못하는 지금의 상태를 벗어나서 비워내기를 하려고 한다. 그래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비워내야 봄기운 가득한 이번 봄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맘껏 부딪힐 수도 있으리라. 온전히 들어오고 자극이 되는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리라. 비움의 아름다움 '0'의 경계를 깊은 경외로 받아들인다. 새로운 시작, 수용의 첫 단계를 거부감 없이 수용하려면 비움이 그만큼 깨끗하고 깔끔해야 하겠다. 온전한 비움 뒤에 오는 감정은 그 무엇도 그대로 받아들이리라. 평범하게 받아내고 다시 뱉어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맘 한편에 자리한다. 그렇게 다시 살아간다. 연속적인 일상의 깨달음 감정의 깨짐이 바로 우리의 사는 모습,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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