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 한소 Jun 23. 2022

사랑한다는 말이 남긴 상처

현실에서 가장 큰 적이 가장 의지 할 수밖에 없는 방어벽이라는 모순

새벽은 깊어만 가고 뜬 눈으로 카톡을 확인하며 딸아이의 귀가를 재촉하고 있었다. 몸이 지쳐서 마음이 현실을 놓아버린 건지 현실이 부담이 되어 몸이 더욱 고달팠던 건지, 경계에서의 갈등과 좋은 엄마 모양새 쫓아가기가 참 힘이 든다. 그것은 부담으로 매번 가슴을 눌렀다.




딸아이는 주말이라 공부량을 좀 더 늘린다더니 스터디 카페에서 꽤 늦어졌다. 아이의 움직임을 쫓아 눈과 맘을 움직이다 시간을 놓쳐 깜박 의식의 끈을 놓고 꿈과 현실 사이를 왕래하고 있었다. 집 앞이라던 아이는 좀 더 늦어졌다. 연착되는 열차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때의 조바심과 걱정까지 더해졌다. 넋 놓고 계속 기다릴 수는 없었다.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스터디 카페에서 각자 공부하던 두 친구가 더 있었고 모두 귀가차 밖으로 나왔단다. 그때 갑자기 한 친구가 집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고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하루만 우리 집에서 재워주면 안 되냐고 딸아이의 입을 통하여 대신 묻는다.


깊어진 새벽이 꼭 선을 그으라고 할 거 같았다. 그래야 다음의 일이 더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거 같았다. 사정이 뭔지  모르겠지만 안된다며 일단 오늘은 들어가고 낼 다시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다. 친구에게 잘 얘기해서 설득을 하라고 딸아이에게 단호하게 했다.  친구는 두려움과 함께 지금 집에 들어가면 아빠로부터 듣게 될 야단과 함께 상황이 더 심해지면 욕설까지 돌아온다고 했다. 나머지 두 친구는 그 소리에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친구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깊어진 새벽이 다시 혼란스러운 틈을 고서 조금의 평화를 찾고자 어른인 내게 SOS를 한 것이다. 대강의 일들과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가 부모의 폭언과 더해서는... 그 소리에 가슴 한 곳이 철렁 내려앉음에도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엄한 부모라아이가 그들의 곁에서 오늘 온전히 사라지게 다면 부모는 당연히 걱정을 하신단다." 일단 설득해서 들어가는 쪽으로 얘기를 해보고 그리고 낼 만나자고 했다. 시간이 늦어지자 아이들이 밖에서 방황하는 게 점점 더 염려되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그 친구는 딸아이와 성이 다른 남성이기 때문이었다. 옆에 있었던 한 친구가 같은 성이었기에 그 친구에게 부탁을 했는데... 허락을 미리 받지 않아서 부모님께 야단맞을 걱정으로 거절을 다. 결국 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위험에 노출되는 더 깊어진 새벽, 아이들을 더는 그곳에 둘 수가 없었다. 일단, 너무 위험하니까 즉시 함께 들어오라고 다.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걱정이었다.


잠시 기다리는데 생각의 시간이 필요했는지 아이는 좀 늦어졌다. 한참 후에 아이와 친구가 함께 왔다. 왜 늦었는지 물어보자 친구 엄마가 친구를 찾으러 나오신 건지 아니면 엄포를 하려고 나오신 건지 거리를 배회하다 아이들이 들어오려는 찰나 마주쳤단다. 친구의 가방과 핸드폰을 모두 뺏어서 가져가셨고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한마디 덧붙였다고 다. 친구 엄마와 마주치자 한 친구는 두려움에 도망을 갔다. 딸아이는 친구를 혼자 두고 올 수는 없었어 기다렸다고 다. 딸과 함께 온 친구는 그동안 이름만 익숙하게 듣던 친구였다.


얼굴은 걱정을 잔뜩 짊어진 듯 어두운 빛이었는데 그래도 자신의 얘기를 답답함에 일부 쏟아냈다. 친구의 얘기 중에 사랑이라고 위장하고 있는 집착을 친구 어머님은 아이에게 어릴 적부터 쭉 해 오셨다고. 말을 잘 듣던 어린 시절에는 일상이나 특별한 경우라도 조금씩 표출하면서 큰 문제가 없었단다. 아이는 다른 친구들도 모두 자신처럼 그렇게 지내고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부모님이 핸드폰을 모두 통제하고 위치 어플까지 이용해 아이를 쫓으며 관심을 지나치게 표현하는 부분도 당연하게 여겨왔던 거 같다. 위치 어플의 오류로 동선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연신 연락을 하셨단다. 조금이라도 반항이나,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을 경우 친구와 대치 상태로 필사적인 몸싸움도 있었다는 거다. 친구의 몸에는 이후 표식같이 지나간 상처나 흔적 보였다. 그래도 "어머님의 그런 행동이 지속적인 건 아니지?" 그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는 엄마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성적도 많이 올렸는데 끊임없이 다른 것을 요구하신다고... 친구는 학업 성취의 맛을 알고 있는 거 같다. 성취감에서 시작해서 친구 스스로 학습과 진로를 선택하고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친구에게 지금 중요한 건 무엇일까?


사실, 그 친구의 입장에서 온전히 생각했다. 겪고 가슴 깊이 전해지는 진실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은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부모이기에 감정이입이 지나치게 되어 생각이 깊어졌다. 지나치게 그곳에 침잠되어 헤어 나오기가 벅차다.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을 현재 주어진 프레임만큼 딱 그만큼에서 현명하게 해결해야 하는 의무도 있다. 난 부모이기에...


부모라는 같은 입장에서 내가 대신해 사과하고 싶었다. 물론 친구가 더 강해져야 하고 독립적으로 변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친구의 어머니는 친구의 큰 적이기도 하나 가장 큰 보호벽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위한삼아 엄마의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왔었던 거 같다. 독립이라는 단어는 가정이라고 위장된 그곳을 벗어나기에 가장 합한 단어이고 처신이다. 하지만 친구는 감히 도전을 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속한 세상이 비록 자신을 너무 힘들게 하더라도 그곳을 절대 벗어나지 못할 그런 나이, 환경, 익숙함... 친구의 얘기를 들을수록 답답하기만 했다.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고 잠시 얘기를 들어주고 임시 하루 거처를 만들어 주는 것뿐. 이부자리를 확인하고 잘 자라고 인사 후 누웠다. 밤인 걸로 착각한 새벽이 아침을 향하고 있을 때쯤 한참을 잠을 이루지 못해 고생했다. 묵직한 머리, 답답한 가슴 때문이었을까. 어른의 역할은 딸아이에게 얘기하듯 끊임없이 겪고 경험하라고 권하고 지지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아이들은 항상 흔들리며 쉽게 넘어간다. 그것조차도 경험이니 많이 겪으라고 응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실의 부모들은 그 경험을 두려워해서 제한하고 차단한다. 그것보다 더 강한 차단과 집착, 제한 등을 친구는 오랜 시간 겪어왔다. 그래서 어쩜 그 상황들이 너무나 익숙하게도 보편적 학생들이면 누구나 겪는 일인 줄 알았다고 했다. 친구의 그와 같은 현실의 상황 자체도 나를 아픔으로 끌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은 잠을 잘 수는 없었다. 잠시 눈을 붙이고 나온 친구와 우리 가족은 아침 식사를 하고 얘기를 나눴다. 딸아이가 논술 수업 가기 전에 달달하고 시원한 것을 원해서 카페에서 크로플과 음료를 나눠 먹었다. 


친구와 함께 오늘 행보에 대해 의논을 했다.


집에 들어가는 것을 많이 두려워하는 친구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 하루 더 보내기는 딸아이와 성이 다른 그 틀에 박힌 사실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게 했다. 친구에게 얘기를 했더니 자신도 이해하고 더 부탁을  수 다고 했다. 그래서  알고 무엇보다 믿을 수 있 성이 같은 다른 친구의 집에서 하루를 더 보낼 수 있게 자리를 만들었다. 사실 나의 마음씀이 옳다거나 정석적인 행위인지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아이를 지켜주고 싶었다. 사정을 이해하고 흔쾌히 도와주신 다른 친구 어머님의 도움이 무척이나 감사했다. 묵묵히 친구에게 결정권을 주는 친구의 아버님께도 깊은 감사가 저절로 나왔다. 친구를 그분들께 보내고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두 친구는 같은 반이며 공유할 수 있는 게 많은 성이 같다는 장점까지. 운동을 하고 씻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메시지를 남기셨다. 아침에 두 친구가 알아서 담임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고 함께 등교를 했다. 이제는 친구가 결정하고 선택 일이다. 참고 이겨내는 것도 그 친구의 몫이리라. 담임 선생님께서 힘이 되어 주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딸아이는 가끔 그냥 부딪힌다. 몰아붙이기도 한다. 때론, 결정에 있어 갈등하는 순간 벌써 결정이 끝나 버렸고 그 한가운데 속해서 움직이고 싸우고 있다. 이번의 일처럼 사각지대에 가려져 있는 주변 여러 가정의 일은 몰랐을 때는 모두가 일상적인 생활을 해 나가고 있는 거처럼 보인다. 막상 그 속에 뛰어들면 특별함이라고 표현하기에도 어렵고 안타까운 일들이 다. 딸아이를 통하지 않고는 겪을 수도 경험하지도 못했을 일들.




 가끔은 위장되어 있는 현실을 지나치게 믿고 있는 자신이 보인다. 안정된 사회에 속한 그것만을 인정하고 누리려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람이 아닐까라는 혼란과 죄책감이 파고든다. 그것을 깨우치게 해 준 딸아이가 참으로 감사하다. 위대한 딸아이는 나를 성장시키는 스승이다.  때론 강한 두려움으로 직접 끌어서 불안한 내면은 감출 수 없고 동공이 심하게 흔들릴지라도.

작가의 이전글 너는 보았고 나는 보지 못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