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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 한소 Jun 12. 2022

너는 보았고 나는 보지 못했다

'파사칼리아' 선율의 첫사랑

너는 보았고 나는 보지 못했다.


나는 하려고 했고 이기려 했다. 너는 거두려 했고 '그만이다'라고 말했다.


밤새 갈증을 적당히 해갈시켜준 비가 고맙게도 산뜻한 바람까지 데리고 왔다. 새벽 공기가 말해준다. 짙은 오후의 석양보다 비가 잠시 데려온 상쾌한 바람이 더 반갑지 않냐고. 이 봄 끝자락에 봄바람과 마주한 너는 눈물 고인 눈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흐르는 것이 그저 평범한 눈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너는 보았고 나는 보지 못했다. 


지는 해의 쓸쓸함이나 초겨울 오후에 느껴지는 두텁고 아련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다. 너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최근 '파사칼리아'에 빠져서 세상을 온통 그 기분에 젖어 채워 나가는 나를 걱정했었. '파사칼리아'를 듣고 다시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내면을 성장시켜 자신을 찾아 나가는 모습이 든든했다. 그와 동시에 석양이 짙게 내려 깔린 길 한가운데서 무엇이든 혼자 겪어 나가려던 자신이 쓸쓸함 속으로 침잠해버릴까 두려웠다. 고민하는 두려움을 누른 슬픔이, 내 코끝과 귓불을 스치고 지나갈 상쾌한 바람을 선뜻 데려다주었다.



하늘은 어느 시간보다도 고우면 특별했어. 양털 구름인지 솜사탕인지 엷게 깔려 퍼지는 하늘 속에서 그것들을 쫓아 헤매게 했고 한 번의 경험으로 고개는 자꾸만 하늘을 향하했어. 일단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어. 손을 뻗어 한번 쳐다보게 한 뒤 하늘 한가운데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자신을 가둬뒀지. 콧속을 파고드는 여름 바람 인척 위장하고 있는 늦은 봄바람이었어. 마냥 사랑스러워야 하는데 두려움이 먼저 밀려왔어. 이젠 정말 끈적끈적하고 답답한 여름 바람이 되어버린 걸까. 하지만 나는 그런 네게도 감사하단다. 결국 다시 좀 더 성숙해지고 산뜻해진 가을바람으로 돌아올걸 알고 있었으니까. 우리는 삶을 순회하삶은 자연 안에서 순환되지. 자연이 그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나의 일상은 자연을 닮아 함께 흘러갔지. 순환되고 반복되는 삶 가운데 나는 늘 존재해 있어. 궤도 안에서 방황하고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다가도 평범한 거처럼 소 불 규직적인 발걸음으로 걸어가지.


그런데 왜 나는 보지 못했던 걸까? 왜 나는 보지 못하고 너는 보았을까?


도덕이라고 진실이라고 나를 포장하고 포장했어. 그래서 이젠 스스로 위장하고 있는 것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 인지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누군가를, 타자를 위한다는 말로 위장을 하고 있었어. 결국 그건 스스로 상처받을까 봐 강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으로 억누르고 있었지.


초겨울 오후 4시가 넘어가면서 오후의 고독을 햇살 가득 받았지. 빛 하나하나에 아련함이 실려와 오후의 그 공간과 시간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어. 그리고 누군가는 스치고 지나간 섬광 같은 순간을 나는 그냥 보낼  없었어. 나의 온몸 구석구석 뻗어있는 세포까지 아련함이 전달되었어. 그 마음만이 그 역할을 하진 않았다는 거야. 그 순간에 들려왔던 소리, 나를 에워싸고 있는 넘치는 사랑이 한 사람을 더 고독하게 했어. 그리고 느껴지는 온도와 습도가 쓸쓸함을 덮고 덮어서 그곳에서 외로움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했어. 모든 것에 휘둘리던 감정까지도 고독을 에워싸며 가장 적정한 환경을 만들었지. 왜 하필이면 그 시간 그곳에서 '파사칼리아' 선율이 흘렀으며 내 귀에 들렸는지 이제는 알 거 같아.

 

이제는 너에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들리는 그 소리.


비록 그것이 나를 미치도록 쓸쓸함으로 빠지게 , 그 순간의 외로움으로 고독이 똘똘 뭉쳐 모든 것이 접근하지 못할 만큼 얼어붙어도 나에게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려고 해. 소리를 들으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만큼 깊어지며  지나칠 수가 없어. 소리가 너무나 아련하고 먹먹해서 가슴에 남아. 나에게는 들리지만 너는 들을 수 없는 그 소리, 겨울 오후 4시의 아련한 소리가 한없이 손짓하는 대로 움직이려고 해. 첫사랑처럼. 지나고 나면 너무나 가슴이 벅차고 넘치는. 아련한 그 시간을 떠올리며 지금의 고독이 생각보다 더 쓸쓸하지만 다행이다 싶어. 



고독으로 주변의 에너지를 끌어당기고 충분히 겪고 감내한 지금도 여전히 먹먹함은 남아있다. 삶은 행복과 사랑을 송이송이 전달했다. 스스로 자신을 제대로 보고자 했던 어느 날, 자연에게 감동을 받은 건 삶이 전달한 사랑이 있었기에 신뢰하고 견딜 수 있었다. 그렇게 환상을 꿈꾸며 그곳에 푹 빠져 있던 어느 날 눈을 떠보니 꽃밭 가득 채워진 잡초가 보였다.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삶의 번뇌와 상처 고통이 행복과 사랑보다는 세포 구석구석으로 더 깊이 채워져 있었다.


내게 삶이 연명해야 할 생명 같은 것이라면 감내하고 인내하는 방어태세를 대신해 부딪히고 깨어지려고 한다. 나를 찾아가는 여정은 고독 자체이다. '파사칼리아'의 선율은 반복하고 반복되는 내 쓸쓸함과 뭉쳐진 고독이다. 하지만 그 선율에 언제나 위안을 받고 먹먹한 맘으로 다시 설렘을 시작한다. 첫사랑이 그랬던 거처럼. 이제 다시 빠져나올 수 없을 거 같았던 하늘 가운데서 현실로 한걸음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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