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28년 동안 교육청 소속 기술직 공무원으로 근무하시고, 10년 전에 정년퇴직하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희 삼 남매에게 늘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공무원이 최고다.”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공무원이 최고의 직업이어서가 아니라, 아빠가 살아오신 인생 속에서 공무원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었다는 걸. 최근에서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아빠가 이력서를 좀 수정해 달라며 집에 오셨습니다. 바쁜 마음에 요청하신 작업만 해드리고, 별다른 생각 없이 넘겼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열었다가 아빠의 이력서를 자세히 보게 됐습니다.
남편과 아이가 모두 잠든 고요한 밤, 궁금한 마음을 담아 이력서를 조용히 읽어 내려갔습니다.
A4 한 장에 빼곡히 채워진 삶의 흔적들. 그 속에는 제가 알지 못했던 아빠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 아빠는 1952년생, 올해 일흔셋. 제가 살아온 날들보다 30년을 더 살아오셨습니다.
경상북도 울진군 갈면리, 한적한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셨고요. 어린 시절,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형제들뿐인 집에서 마음 둘 곳 없이 지내셨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생계를 위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부산의 철강 회사, 해병대 자원입대, 다시 유리 공장…20대 내내 거친 육체노동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셨습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다 마침내 선택한 마지막 목적지가 서울이었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도시. 그곳에서 송파구 마천동 산동네에 작은 터전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1986년, 서른둘의 나이에 9급 기술직 공무원으로 특별 채용되셨고, 2014년 7급 공무원으로 퇴직하기까지 무려 28년을 한결같이 일하셨습니다.
제가 지금 앉아 있는 7급 자리에 오기까지 아빠는 무려 28년이 걸리셨습니다. 그런 자리를 저는 너무 쉽게 얻는 건 아닐까, 어쩌면 그 보다 더 많은 것들을 더 쉽게 얻지는 않았나…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아빠의 젊은 날은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듬직한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일이든 능숙하게 해내고, 흔들림 없이 가족을 지켜내는 사람. 그런데 그 모습 뒤에는 살아남기 위해 애쓰고 또 애쓴 날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습니다.
퇴직 후 10년이 지난 지금도 아빠는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런 아빠가 늘 이해되지 않았는데, 이력서를 보니 알 것 같았습니다.
가스안전관리, 에너지안전관리, 조경관리, 집합건물관리… 자격증만 여덟 개. 퇴직 후의 삶을 미리 준비해 오셨던 겁니다.
아빠는 또 새로운 희망을 품고 계십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죽는 날까지 일하고 싶다.’
제가 수정해 드린 이력서 역시 올해 새롭게 들어갈 회사에 제출할 용도였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아빠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일하셨으면 이제 좀 쉬셔도 되지 않을까?”, “연금으로도 충분히 생활하실 텐데…”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아빠에게 ‘일’은 단순히 생계수단을 넘어, 살아가는 이유이며 삶의 즐거움이라는 것을.
누군가는 일과 삶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고, 또 누군가는 일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우리 아빠는 후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빠의 삶은 누구보다 숭고하고, 고귀했습니다.
아빠의 이력서를 다시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28줄, 그 한 줄 한 줄에 스며든 시간들의 무게감이 전해집니다.
아빠의 인생을 이력서가 진하게 제 마음에 새겨집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우리 아빠…우리 아빠의 이름은, ‘장’ 자, ‘태’ 자, ‘식’ 자입니다.
* 위 글은 유홍준 작가의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중 ‘우리 어머니 이력서‘에서 영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