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잠들기 전에 영화를 한 편씩 보는 취미가 생겼다.
우리 집엔 스마트 모니터가 있다. 전남친이 생일 선물로 사 준 스마트 모니터와, 내가 전남친에게 선물해 준 스마트 모니터 거치대가 거실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그걸로 넷플릭스도 보고, 유튜브도 본다. 그게 생기고나서 콘텐츠 소비량이 늘었다. 숏폼도 보고, 롱폼도 보고, 다 본다. 적막이 점점 깨져간다. 너무 시끄럽다 느껴질 쯤엔 플레이리스트를 튼다. 틀어놓고는 음소거를 한다. 화면을 가만 들여다본다. 결국 듣지도 않을, 음소거를 해놓고 그냥 틀어놓을 플레이리스트를 고르기 위해 소비한 시간은 몇 분이었나 가늠해 본다.
오늘 점심엔 아무것도 틀지 않고 점심을 먹었다. 밥이 딱딱했다. 계란찜에 밥을 말아먹었다. 조금 나은 것 같다. 반찬가게에서 사 온 미역줄기무침과 이름 모를 약간 쓴 나물초무침을 번갈아가며 씹는다. 계란밥을 먹고 미역줄기무침을 먹으니 느끼하고 비리다. 물을 한 모금 마셔 입을 헹구고 김에 계란밥을 싸 먹는다. 조금 낫다.
핸드폰 화면이 반짝인다. 생각할 겨를 없이 핸드폰을 든다. 테무에서 온 알람이다. 나한테 사과를 한다. 죄송하다고 쿠폰을 준단다. 아무것도 안 샀고, 구경만 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사과를 한다. 감사의 의미로 준다는 그 쿠폰이 아무 쓸모없는 걸 알면서도 어플을 지우지 않는다. 푸시 알람만 한 번 지운다. 테무 앱 위에 쓰인 숫자, 244. 들어가서 알람이라도 지우고 나올까 싶다. 잠금을 푸는 순간 카톡이 온다. 카톡을 들어간다. 광고인 걸 봐놓고도 들어가서, 오지 않은 답장을 한 번 더 보고, 스레드를 들어가 게시글을 세 개쯤 보다 다시 밥을 한 수저 뜬다.
고양이가 베란다 문을 긁는다. 발톱소리가 토독 톡 토오옥 톡톡 들린다. 다시 일어나 문을 열어주니, 찬바람에 놀란 듯 잠시 멈춘다. 베란다에서 놀아, 하고 돌아와 다시 밥을 먹는다. 고개를 들어 까만 화면을 들여다본다. 스마트 모니터가 있다. 아무것도 틀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밥을 먹었는데, 아무것도 보지 않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밥을 꼭꼭 씹으며 허공을 바라본다. 계란찜이 밍밍하다. 소금 좀 더 넣을걸. 아닌가, 물이 많았나?
마지막 한 입을 입에 문 채로 그릇을 들어 정리한다.
오늘은 아무것도 보지 말아야지. 오늘은 아무것도 틀어두지 말아야지. 오늘은 그냥 집을 조용히 두어야지. 나는 청각이 예민하잖아. 요즘 마음이 많이 예민하더라니, 정적이 없었네. 사실 알고 있었잖아? 머릿속이 시끄럽다. 나 혼자서 말을 주고받는다. 나 혼자서 수십의 나와 대화를 나눈다.
양치를 하고, 패딩을 입고, 립밤을 다시 바르고 아이패드 충전을 확인한다. 60%. 충전기를 꽂은 채 영양제를 먹고, 관절약과 비염약을 먹고, 거울 한 번 다시 보고, 충전기에서 아이패드를 꺼내 가방에 넣는다. 가방을 메고 나와 카페로 향한다. 카페를 가며 생각한다. 가서 그림 콘티를 마무리 짓고, 만화까지는 모르겠고, 뭐라도 글은 쓰고 싶고, 뭐라도 정리를 해야 할 것 같고, 근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고, 일단 가서 스케쥴러를 펼쳐봐야겠다.
스타벅스 2층에 올라 창가에 앉는다. 일반 아메리카노보다 200원 더 저렴한 오늘의 커피를 시킨다. 오늘의 원두는 에티오피아라고 한다. 커피 맛은 모른다. 그냥 조금 더 고소한 커피일 것 같다. 어디서 그런 걸 그냥 들었던 것 같다. 산미가 있든 고소하든 아무 상관은 없다. 그냥 늘 오늘의 커피를 주문한다. 스케쥴러를 연다. 오늘 할 일이 정돈되어 있는데, 뭔가 빠진 기분이다. 뭔가 가득 차있는데도 뭔가 놓친 기분이다. 뭔가가, 뭔가가 부족하다. 정돈해야 해. 정리해야 해.
속속들이 들어와 있는 웹툰 원고를 살핀다. 총 30p가 넘는 원고. 현재 16p까지만 진행되었다고 하신다. 그래도 30p를 모두 다운받아야 원고가 열린다. 작업하다가도 다시 원고를 다 다운받고, 다시 정리해야 한다. 그럴 바에 그냥 집에 가서 조금이라도 더 완성되면 그걸 다운받자 생각한다. 그러다 고민한다. 오늘 작업할 땐 뭘 틀어둘까. 플레이리스트가 좋을까. 얼마 전 발견한 아날로그 풍의 곰이 식빵을 물고 있던 재즈 플레이리스트가 생각난다. AI가 만들어낸 색연필화에 마음을 내어준다. 한국 드라마 중에 적당히 유쾌하고 너무 심오하지 않고 화면을 들여다봐도 되지 않는 로맨스 코미디 드라마를 고민한다. 그래야 작업할 때 틀어두기 좋으니까. 고민해봐야 이따 작업할 땐 다시 또 뭘 볼지 고민할 게 뻔하니 고민을 덮는다. 대신 오늘은 자기 전에 뭘 볼 지 고민한다. 유튜브 말고, 자극적인 예능 말고, 오늘은 무슨 영화를 볼까. 이왕이면 넷플릭스에서 보고 싶다. 히터를 틀어두면 소리가 잘 안 들린다. 소리가 잘 들려도 소리를 가늠하기 어렵다. 한국 영화여도 자막을 틀어둘 수 있는 넷플릭스에서 보고 싶다. 시각과 청각이 동시에 피로해짐을 느끼면서도 마음 어딘가가 채워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눈이 아프고 귀가 아프고 목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다는 걸 이해하면서도 영화를 본다. 1시간 반이고, 2시간 반이고 영화를 본다. 새벽 늦게까지.
요즘은 잠들기 전에 영화를 한 편씩 보는 취미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