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은 아무 잘못 없지만,

잘못이 있어야만 버릴 수 있는 건 아니야.

by 말복


- 물건은 아무 잘못 없어.


연애 때부터 식혜가 종종 하던 말이다. 내겐 몇 년 전 예전 연인이 선물해 준 에어팟이 있었는데, 그 이유와 청력의 문제로 언젠가부터 잘 쓰지 않게 되어 존재를 잊고 있었다. 집에 들른 식혜가 에어팟을 발견했고, 거짓말하는 것도 찜찜해서 우물쭈물 이야기했더니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러니 눈치 보지 말라고. 그런 성정인 줄 알았으면 선물받은 옷들과 가방도 정리하지 말 걸 싶으면서도 컨버스는 버리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모양새가 좀 이상해졌는데 그 에어팟은 식혜가 쓰게 되었다. 나는 뭘 듣고 다니면 머리가 아픈 노잼인간이었고, 식혜는 뭘 듣고 다니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도파민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툭하면 뭘 잃어버리는 편이었고, 그렇게 내가 연애하면서 본 식혜의 이어폰은 셀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내가 스티커를 붙여준 내 이어폰은 잃어버리진 않았는데, 그 대신 고장이 났다. 식혜는 고장도 잘 내는 편이었다.


연애를 하는 동안에 그 말을 몇 번이고 들었음에도, 나는 가끔 그 말을 의심하곤 했다. 그래서 미처 치우지 못한 예전 연인의 흔적이 보일 때면 재빨리 화제를 돌려왔다. 그 때문에 때때로 식혜의 집에서도 식혜 전 연인의 흔적이 보일 때면 매우 조심스럽게 묻곤 했는데, 식혜는 늘 같은 태도로 일관해왔다. 특유의 담담한 말투로, 때로는 장난기 섞인 말투로.


- 물건은 아무 잘못 없어. 그러니까 말복님도 괜히 눈치 보느라 멀쩡한 걸 버리진마요.


헤어지고 4일 정도간은 식혜 집을 정리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썼다. 헤어진 당일은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 금세 잠에 들었지만, 그다음 날은 세탁기를 옮겼다. 그동안 함께 살면서 수동 세탁기 하나만 써왔다. 그 미니 세탁기는 식혜 집 베란다에 놓였고, 1년 넘게 사는 동안 식혜 혼자 나와 식혜의 빨래를 도맡아 왔다. 수동이라 신경쓸 일도, 몸 쓸 일도 조금 있었는데 손목 아픈 나를 배려해 준 덕이었다.


식혜는 늘 별거 아니라고, 힘들지 않으며, 빨래하는 거 좋아한다고 이야기해왔다. 나는 그 말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면서도 고맙다는 말로 화답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식사도 식혜가 준비했다. 그때도 한결같이 별거 아니고, 힘들지 않고, 요리하는 거 좋아한다는 말을 덧붙이며. 그 말은 청소에도, 정리에도, 사소한 살핌에도 모두 덧붙여졌다. 나는 어느샌가 그 말을 믿고 싶었던걸지도 모른다.


식혜가 집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집에서 쉬었다. 처음엔 별 거 아니니 쉬라고 해서 집에서 혼자 쉬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혼자 기다리는동안 벽을 타고 넘어오는 작은 소리들에 눈물이 새어 나왔다. 한 두 시간을 기다리다가 축축한 눈가로 식혜 집을 찾아갔다. 박스가 몇 개 보였다. 놀라 달려온 식혜가 무슨 일이냐 물었다. 혼자 못 있겠다고, 돕고 싶다고 하자 자잘한 정리를 맡겨주었다. 정리하려는데 보이는 내 흔적들에 눈물이 핑 돌았다. 멍하니 울음만 참고 있는 나를 보더니 이번엔 누워서 쉬라 했다.


누워서 쉬는 동안 물건들이 사라져가는 걸 보면서 마음이 다시 침착해졌다. 실감이 났는가보다. 눈을 감고 가만 정리하는 소리들을 들었다. 달그락 달그락, 찌익- 찍, 쿵 쿵. 식혜는 그동안 내가 울적하지 않게 중간 중간 찾아와 살피거나 괜찮은지 물었다.


어느덧 마음이 진정되자 식혜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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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희망을 그리는 행복한 말랑 복숭아, 말복입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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