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 덤덤한 척 헤어지기
식혜가 본가로 내려간 지 23일만에 만났다. 참여하던 프로그램의 소재지가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노린 게 아니라고 말할 순 없다. 어쨌든 간 김에 겸사겸사 함께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서는 카페에 가서 회의를 했다. 최근 작업 중인 외주 건에 디자인적인 어려움이 있었는데 식혜가 디자인 전공이어서 도움을 요청했다. 이것 역시 노린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계속 붙어있을 구석을 찾았다. 헤어진 후 나는 자꾸만 뭔갈 노린다. 만날 구석, 대화를 이어갈 구석. 어디까지 찌질해질 셈이지?
만나기 열흘 전만 해도 그런 생각을 했다. 좀 구질구질하긴 해도 찌질하진 않은 것 같아. 솔직하잖아? 착각이었다. 찌질하다. 돌아보니 너무 찌질하다. 이 말을 다른 사람한테 하지 않아 다행이다.
8월 중순 단백질 바 하나와 아메리카노 한 잔을 손에 들고 열차에 몸을 실었다. 너무 늦게 예매한 탓인지 역주행 좌석이었다. 풍경을 정성스레 눈에 담는 척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실은 그 어떤 것도 눈에 담기지 않았다. 눈을 감고 프로그램을 시뮬레이션했다. 잠시 일에 빠져들어야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프로그램이 좀처럼 잘 풀리질 않았다. 새벽부터 가기 위해 전 날 밤 언니네 집에서 머물렀는데 속상했다. 생각이 깊어지느라 프로그램에 집중할 수 있었다. 딴 생각을 하지 못 하고 프로그램에 최선을 다 하다가 식혜를 만났다. 23일만이니 잊혔을 리가 없는 익숙한 실루엣이 저 멀리 사람들 틈 사이로 걸어오고 있었다. 하얀 피부에 하얀 반팔티, 베이지색 슬랙스, 그리고 앞머리가 신경쓰이는 거면서 햇빛이 따가운 척 들어 올린 어색한 팔과 그에 따른 동세. 저 멀리 보이는 실루엣인데도 마치 코 앞에 있는 것 마냥 선명했다. 잠깐 스친 건데도 표정이 보이는 듯 했다.
그리고 숨었다. 나도 모르게 환하게 웃으며 달려가 안길 것 같았기 때문에.
나를 자제시켜야 했다. 터져 나올 것 같은 마음들을 꽁꽁 숨기려 아무것도 못 본 척 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나를 세뇌했다. 정신차려, 정신차려, 정신차려! 마음을 굳게 먹고 가까이 왔을 즈음 고개를 들었다. 역시 아까 잠깐 보인 게 식혜가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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