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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희 Feb 06. 2017

포퓰리즘이라 불리는 것들

루이뷔통 X 슈프림 콜라보의 교훈

포퓰리즘이라 불리는 것들


올해 다보스 포럼의 주제는 ‘소통과 책임의 리더십’이었다. 

다보스에선 지금 미국과 유럽이 포퓰리즘의 광풍에 휩싸여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있었던 이탈리아의 개헌 부결,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당선, 이런 사건을 모두 싸잡아 포퓰리즘이란 말로 일컬으면서 말이다.


한국이 연일 최순실 사태와 촛불집회로 정신이 없었던 지난 12월, 블룸버그(Bloomberg)지에는 한국의 포퓰리즘을 경계하는 기사가 실렸다. 제목은 “포퓰리즘이 한국을 잠식하고 있다"였다. 브렉시트와 트럼프 효과, 포퓰리즘이 지금 한국에도 상륙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 기사에는 촛불 집회의 과격한 장면들이 다수 사진으로 포함되어 있다. 지금 우리에게 포퓰리즘이란 말은 어울리는가.



우리의 시민의식은 포퓰리즘이라 불리기엔 월등히 성숙해 보인다. 지난 12월, 정치 스타트업 ‘와글’이란 곳에서 온라인 시민의회를 만들자는 의견을 냈다 백지화한 일이 있었다. 이들은 새로운 대안 민주주의 체계가 필요하다며 촛불 민심을 더 적극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온라인 의회를 구성하자고 했지만, 시민들 대부분은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누구도 촛불민심을 세력화하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수한 민주주의의 회복, 시민들은 거기서 양보하지도, 더 앞서 가지도 않았다. 트럼프 류의 혐오주의자들이 보여주는 광기와 우리의 모습은 너무도 달라 보인다.


영국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브렉시트는 또 다른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 브렉시트 개표 후 언론에선 더 나이 들고 못 배운 사람일수록 브렉시트에 찬성했다고 보도했다. 아닌 게 아니라, EU 통합으로 더 많은 기회를 상실한 영국인들은 못 배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못 배운 사람들의 수가 그렇게나 많다면, EU 통합은, 그리고 세계화는 과연 누구를 위해 정당한 것일까. 아니면 그 못 배운 사람들은 세계화라는 큰 흐름에 자신의 삶쯤은 기꺼이 희생했어야 마땅한 존재들일까.


포퓰리즘이란 애초에 무엇이었을까.


누군가는 극우주의자의 집권을 포퓰리즘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과도한 복지 정책의 집행을 포퓰리즘이라 부른다. 그런 면에서 극우파인 트럼프의 집권은 포퓰리즘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국 국민들은 극우주의자를 지지하지도, 과도한 복지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정은 지금 포퓰리즘이라 불린다.


우리는 국민투표를 민주주의의 대표적 방식이라 믿어왔고 그 결과가 나의 의견과 다르더라도 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미덕이라 믿어왔다. 최근 세계 곳곳의 국민투표 결과는 소수 엘리트들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가 한 때 민주주의라 불렀던 국민투표의 결과가 다보스 피플들이나 글로벌 기업들, 정치가들의 의견과 다르면, 그땐 우매한 것으로 간주되어 포퓰리즘이 되는 걸까.


민주주의와 대중영합의 차이는 누가 어떻게 구분해 낼 수 있는 걸까.


패션의 새로운 룰, '대중 속으로'


패션은 그 시대의 거울이라고들 한다. 패션에도 지금 여러 가지 새로운 룰이 생겨나고 있다. 그중 가장 놀라운 변화는 대중들이 더 이상 상류층을 모방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젊은 소비자일수록 커서, 어느 날부턴가 젊은 층들이 선호하는 브랜드 리스트는 명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생태의 브랜드들로 채워지게 됐다.


이런 양상은 명품 브랜드들에게 위기감을 가져다주었다. 대중들의 인플루언서(Inflencer)는 이제 대중 안에 있다. 누군가 인플루언서가 되려면, 대중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명품 브랜드들은 지금 스트리트 브랜드들과 어떻게든 접목점을 찾으려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명실공히 최고의 명품 브랜드라 자부하는 루이비통의 이번 패션쇼는 스트리트 브랜드 슈프림(Supreme)과의 콜라보로 이뤄졌다. 루이비통이 스트리트 브랜드의 손을 잡았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왔던 건 콜라보 제품의 대다수가 루이비통의 로고보다 슈프림의 로고로 더 많이 도배되었다는 점이었다.



혹자는 루이비통이 자충수를 두는 것이라 비난했다. 스트리트 패션과의 영합은 명품 패션의 본질을 흐리는 일이라면서 말이다. 과연 그럴까?


스트리트에서 슈프림이란 브랜드의 위상을 아는 사람이라면, 루이비통의 전략이 얼마나 영리한 것이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루이비통은 이 한 번의 콜라보로, 전에는 자신을 고루하게 생각했을 10대들에게 쿨한 존재로 등극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슈프림의 로고를 빌어오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명품 브랜드들은 그게 어떤 모습이건 시장과 새로이 소통하기를 원하고 있다. 어떤 기업은 스트리트 디자이너를 영입하기도 하고, 어떤 기업은 루이비통처럼 콜라보를 시도 중이다. 그들이 엘리트주의에 얽매이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오랜 세월 브랜드를 지켜오면서, 브랜드의 신념을 지킨다는 것과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별개의 것임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원적 무지에 봉착한 엘리트들


다원적 무지(Pluralistic Ignorance)는 실제로는 다수의 의견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개인에게는 이것이 소수의 의견일 것이라고 잘못 인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소수의 입장을 다수의 입장이라 잘못 인지하는 것도 다원적 무지에 속한다.


예를 들어 지금 특검의 조사를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원적 무지에 봉착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다수가 생각하는 정의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들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일 거라 착각하고, 지금 분노하는 사람들이 소수일 거라 착각한다. 이들은 자신의 반대파들에 대해, 위험한 사람들이지만 소수이기에 힘으로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는 대상이라 여긴다. 그들의 무지함은 신기할 정도다.  



때론 이들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의 엘리트란 사람들이 지금 다원적 무지에 봉착해 있는 건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특히나 요즘처럼 포퓰리즘의 위기에 목소리를 높일 땐 더더욱 그렇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경제 판도만 바꾸어 놓은 게 아니다. SNS와 통신의 발달은 평범한 사람들을 커뮤니티로 대거 끌어들였고, 사람들은 거기서 무엇이 다수의 의견인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며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눈으로 보이는 다수의 의견, 그 힘의 설득력은 생각보다 크다.


이런 시대에서 소수 엘리트들이 이끄는 정치가 통할 것인가.

이제 그런 정치는 수명을 다한 것 같다. 포퓰리즘은 그런 시대가 끝나는 와중에 몇몇 나라에 불거진 문제일 뿐, 각 나라가 겪고 있는 정치적 문제의 본질은 그렇게 싸잡아 말해지기엔 사실 저마다 다르다.


이탈리아의 국민들은 자신들이 지지할 당이 없어 스스로 오성 정당이란 당을 꾸렸다. 국민들이 당을 꾸릴 수밖에 없었던 과정은 눈물겹다. 그들은 어쩔 수가 없었을 뿐이다. 정경유착과 언론탄압으로 어디에도 속을 터놓을 수 없었던 국민들이 한국의 딴지일보 같은 어느 코미디언의 개인방송에 몰리면서 이 당은 생겨났다. 이 당은 처음에는 포퓰리즘 정당이라 불리더니, 최근 들어 제1야당으로 올라선 뒤부터는 일부 언론에서 극우정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틀린 말이다. 이탈리아의 극우 정당은 따로 있다.



아마도 이들은 경험이 없어 실패와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행보가 새로운 민주주의의 실험이 될지, 포퓰리즘의 오류가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정의를 추구한다는 것과 현실을 직시한다는 건 별개의 문제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정의는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들이 직접 나서는 것이 새삼 정의를 위협하는 포퓰리즘이란 얘기는 사실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정의는 원래도 없었지 않은가.


지금 직시해야 할 현실은 포퓰리즘의 경계 같은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그간 소수 엘리트 정치가 쌓아온 적폐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직시하는 것, 정치가 더 이상은 소수 엘리트의 밀실에서 이뤄지기 어려운 시대가 됐음을 직시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우리 스스로 ‘스마트한 소비자’라 부르는 대중들이 바로 시민일진대, 그들이 정치적으로는 갑자기 우매해졌다는 얘기가 믿겨지는가. 순수한 민주주의의 회복, 그것만 이루어진다면, 한국의 시민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타국의 시민들도 더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정말 포퓰리즘이 두렵다면, 대중을 경계하란 말보다는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 게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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