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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희 Apr 03. 2017

얼킨(ul:kin), 이성동의 도약

17-18 헤라 서울패션위크

2017.3.30

Photo : 서울패션위크 by 패션체널


패션위크 런웨이 리뷰 : 얼킨 (ul:kin)


지난 30일 얼킨의 쇼를 보기 전, 나는 얼킨을 주로 아티스트와의 콜라보를 하는 가방 브랜드라고 알고 있었다.

막상 쇼장에 들어서니 GN쇼 답지않게 프런트 로우를 꽉 채운 업계 관계자와 선후배 디자이너들, 바이어들이 얼킨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그리고 쇼장에서 의자에는 에디션 노트로 보이는 한 장의 카드가 놓여 있었고, 여기엔  “Silent Docent”라는 테마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침묵하는 지식인’을 의미하는 이 무거운 주제에는 그간 사회의 부조리를 외면해 온 지식인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스토리가 담겨있다. 아, 얼킨이 이렇게 심오한 브랜드였나.


그러나 막상 쇼가 시작되자, 여러 가지 질문들이 머릿속에 혼란스럽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첫째, 가방 브랜드라기엔 얼킨의 경우 옷이 너무나 쿨하게 돋보였다. 바이어라면 당장에 주문했을 오버사이즈의 테니스 니트들은 소매를 몸판에서 떼어 연결하면 또하 나의 멋진 머플러가 되는 2-way 구조였다. 여기에 잇달아 등장한 화이트 코듀로이의 박시한 재킷들, 데님 스트라이프 트렌치, 좋은 질감의 페이크 퍼 코우트들은 얼킨은 가방 브랜드라기보다는 쿨한 ‘패션 브랜드’ 임을 선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어째서 얼킨은 이런 좋은 옷을 가지고도 가방 브랜드로 알려지게 된 걸까?    


둘째, Silent Docent는 대체 무엇일까? 얼킨의 옷이 말해주는 메시지는 결코 그렇게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젊은이다운 발랄함과 스포티함으로 가득 찬 이 쇼에 ‘침묵하는 지식인’이라는 주제는 무겁다 못해 버거워 보였다. 다시 꼼꼼히 살펴본 Silent Docent 카드에는 이번에 컬랩한 이상익 작가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아, 그렇다면, 침묵하는 지식인이라는 주제는 얼킨의 가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이상익 작가의 작품 주제였던 걸까. 쇼의 말미에 모델들이 들고 행진하던 작가의 작품 캔버스들이 그 의미를 담고 있었던 걸까.


결국 나는 그 날 리뷰를 쓰지 못했다. 무언가 매치되지 않는 간극의 연결점 사이에서 고민하다 쇼를 완전히 이해 못했을 바엔 쓰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월 1일, 패션위크의 마지막 날, 살림터 지하 3층에서 열리고 있던 오픈부스에서 나는 얼킨의 디렉터 이성동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맘 속에 또아리틀고 있던 질문들을 그에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리의 대화는 처음엔 그리 원활하지 않았다. 나는 우선 핵심적인 질문은 피하고, 지협적인 질문부터 물어 들어가기로 했다. 옷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보자 그는 그간 말하지 않던 이야기들을 비로소 풀어놓기 시작했다.


Q: 저 테니스 니트는 소재가 무언지?

A: 울 아크릴 혼방이다. 더 편하게 입을 수 있는 그런 소재는 없을까 찾다가 아동복에서 자주 쓰이는 소재를 골랐다.  

Q: 원래 얼킨이 이렇게 니트 포션이 높은가?

A: 니트는 어려운 분야다. 이번에는 대학 때 은사님이신 이연희 교수님을 찾아뵙고 많은 도움을 얻었다.


니트 쪽의 실력가들이 교수로 포진한 한양대를 졸업한 그다. 옷을 어떻게 준비했는지에 대한 이런 자세한 이야기를 왜 진작에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멋쩍게 웃었다.


Q.: 저 인조털 코우트 뒤에 크게 쓰인 REAL이란 글자는 무얼 의미하나?

A: 가짜 털에 REAL이라고 써서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나는 리얼 퍼를 잘 쓰지 않는다. 가죽도 되도록이면 안 쓰려고 가방 소재는 따로 개발했다.

Q: 저 체크무늬 코우트도 소재가 독특한데?

A: 저것도 인조 송치다.


요즘 젊은 디자이너들이 에코 퍼를 많이 쓰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얼킨도 그 대열에 끼어 있는지는 몰랐다. 나는 다시 왜 이런 이야기를 진작에 하지 않았느냐 물었고, 그는 또 멋쩍게 웃었다.


Q: 이제 본격적인 질문. Silent Docent는 이상익 작가의 테마인가?

A: 그렇다.

Q: 옷은 Silent Docent랑 무관해 보인다. 오히려 매우 쿨하고 발랄한 느낌인데?

A: 처음 브랜드를 기획할 때, 거리에서 사람들이 예술작품을 들고 다니는 씬(Scene)을 상상했었다. 우린 모두이지캐주얼을 입고 다니지 않나. 그런 사람들이 아트를 소지하는 그런 모습을 늘 상상했다. 이상익 작가는 실은 매우 잘 알려진 작가이다. 그가 말한 Silent Docent는…

그는 꽤 오랫동안 작가에 대해 설명했다. 신기하게도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에는 꽤나 멋쩍어 하던 이성동은 컬랩한 작가에 대해서는 또렷하고 장황하게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해할 수 없었던 얼킨의 마지막 간극이 내 안에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와 대화하는 동안 디자이너 이성동이 어떤 사람인지가 비로소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여기 잘 교육받은 대한민국의 반듯한 젊은이가 하나 있다.

장교로 제대한, 남자답고 입이 무거운 사내는 자기 이야기에 목소리를 높이기엔 아직 멋쩍은 순수를 버리지 못했다. 세상에는, 남이 알아줄 때까지 노력하는 것이 맞는 것이지, 입으로 수선을 떠는 건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꼭 있는 법이다. 특히 갓 서른에 도달한 장교 출신의 젊은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컬랩한 작가는 어떻게든 남들에게 잘 이해시키고 싶었던 그는 누군가 물어올 때면 작가의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그런 그의 행보 덕에 얼킨은 아티스트와 컬랩 하는 가방 브랜드란 인지도를 얻었지만, 그의 쇼를 처음 본 나이 든 에디터에겐 빅 퀘스쳔을 안겨다 주고 말았다.


디자이너 이성동의 작품엔 어떤 모순도 없었다.

그는 옷 하나하나마다 의미를 심어 기획했고, 여기엔 소비자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 단지 그는 자신의 기획의도는 뒤로 한 채 컬랩한 작가만을 설명해 왔을 뿐이다. 사실 에디터란 디자이너들의 이런 독특한 캐릭터 때문에 생겨난 직업인지도 모른다. 모든 디자이너가 완벽한 로직으로 자신들의 작품세계를 설명하는 사람들이라면 에디터는 세상에 필요치 않을 테니 말이다. 나는 농담 삼아 앞으로도 이렇게 에디터들을 괴롭힐 것인지 물었다. 또다시 멋쩍게 웃는 이성동.


이제 그의 나이 서른. 그가 빚어내는 옷의 수준은 이미 멋쩍은 시간들은 진작에 끝내도 좋을 만큼 훌쩍 올라서 있다. 지금은 오히려 디자이너 이성동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알려야 할 타임, 패션브랜드로서의 얼킨의 가치를 늦기 전에 일깨워야 할 타임, 그래서 작가들의 작품이 그의 쿨한 스타일과 맞물려 그가 꿈꾸던 거리, 즉, 쿨한 이지캐주얼과 아트가 조화되는 씬(Scene)으로 점철된 서울이 되도록 도발할 타임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의 중년일까. 한편으론 이 멋쩍은 젊은이의 순수가 너무도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빚어낸 발랄한 옷들은 너무도 예뻤다.  지금 내게 얼킨이 어떤 브랜드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디테일과 소재에 탁월한 안목이 있는 젊은 캐주얼 디자이너 이성동의 ‘패션’ 브랜드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아티스트들과의 컬랩으로 만들어지는 가방 라인 '또한' 잘 알려져 있다”라고 말이다.


다음 시즌엔 이런 이야기를 이성동의 입으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자신의 옷을 어떻게 기획했는지, 이 옷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결국 사람들이 정말 듣고 싶어 하는 건, 이성동이란 디자이너, 바로 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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