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추동 헤라 서울패션위크 리뷰
21일, 오늘은 눈발이 날리는 춘분(春分)이었다.
일찌감치 붐비기 시작한 빅팍 쇼장의 한쪽 벽면은 어두운 숲을 배경으로 낡은 캐빈이 하나 서 있었다. 아마 모델들은 거기로 걸어 나올 모양이었다.
쇼 노트에는 Save The Wolf라고 적혀 있었다. 환경오염과 자연재해로 인한 생태계의 붕괴와 인류의 위협, 어째서 노장의 디자이너는 Save The World나 Save The Woods대신 Save The Wolf란 주제를 택한 것일까.
조명이 환하게 들어오고 쇼가 시작되자, 강한 펑크풍의 록 사운드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하나둘 걸어 나오는 모델들은 세상을 향해 그로울링(Growling)하는 젊은 늑대들처럼 푸릇푸릇하고 반항적인 ‘젊은 아이’들이었다.
정열적인 레드와 체크, 거친 야상과 와일드한 퍼가 빅팍 특유의 호쾌한 테일러링으로 어우러졌다.
체크는 쇼 전체를 아우르는 주요 모티프였다. 트위드 체크 코우트부터 다양한 타탄(Tartan) 피스들, 그리고 니트에 섬세하게 새겨진 윈도페인 체크까지 다양한 체크들이 런웨이를 누볐다.
이 체크 니트 위로는 늑대 모티프가 수놓아졌다. 중간에 거친 필체로 Save The Wolf라고 써내려간 슬로건 티셔츠가 등장하면서 쇼는 클라이맥스에 다다랐다.
빅팍의 시각은 독창적이었다. 그는 생태계의 붕괴와 자연의 위협을 로큰롤과 펑크패션으로 필터링했다.
다른 디자이너들이 에콜로지와 재생섬유, 베이지와 브라운을 중심으로 하는 어스(Earth)팔레트로 자연 보호를 노래할 때, 박윤수는 펑크풍의 체크, 니트와 데님, 스웻수트와 프린트 드레스, 그리고 이 모든 요소들을 뭉개어 해체했다 기워내는 과감한 믹스앤매치로 우리가 처한 현실을 이야기했다.
빅팍이 바라본 인류의 위기는 쓸쓸히 황폐해져가는 자연에 있지 않았다. 그가 포착한 진짜 위험은 희망없는 미래 속에 고사되어가는, 하지만 원래는 늑대처럼 거칠게 무리지어 다니며 포효했어야 할 ‘젊음’이었던 건 아닐까.
빅팍이 그려낸 숲 속의 ‘늑대 아이’들이 다시 캐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쇼는 끝이 났다. 그리고 디자이너 박윤수가 런웨이를 걸어나와 긴 여운의 인사를 남겼다.
구체적인 설명이 없었음에도 그때 아트홀을 채우고 있었던 청중과 디자이너 사이에 선명한 교감이 오가는 순간이었다.
한 편의 영화 같은 컬렉션이었다. 패션은 허영과 사치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오늘 빅팍의 쇼에서 패션은 분명 한 편의 영화이자 음악이고 시(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