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는데, 그래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야?
무언가 특출나게 잘한다기 보다 이것도 좀 잘하고, 저것도 꽤 잘하는, 가진 재주가 많은 사람이 바로 접니다. 타고난 눈썰미와 손재주로 배우지 않은 것들도 빠르게 습득하는 편이라 다재다능하다는 말이 잘 어울립니다. 예전에는 이도 저도 아닌 나의 재주들은 모두 쓸모 없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도 했었지만 잘하는 것들을 조금씩 모아 잘 섞으면 나만의 특별함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이후로는 제가 가진 재주들을 아껴주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어! 라고 믿고 하고 싶은 일들을 펼쳐 왔죠. 가끔 저를 한마디로 소개해야하는 순간이 올 때마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작지만 귀여운 재미를 찾아 주로 책으로 엮는 일을 합니다.' 라는 비교적 긴 문장으로 어찌저찌 해결하곤 했습니다.
"말코님은 외주도 받으시나요? 주로 어떤 일을 하세요?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우연히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만난 디자인 회사 대표님의 질문이었어요. "어........." 저는 책도 만들고, 그림도 그리고, 가끔은 글도 쓰고, 워크숍 운영도 하고, 하고 있는 일들은 많은데 정확하게 제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 소개하자니 말문이 턱 막혔습니다. '다재다능 합니다!' 라고 말하기엔 주어가 다 빠져있었고, '작지만 귀여운 재미를 찾아 주로 책으로 엮는 일을 합니다.'라고 말하기엔 저는 책 만드는 전문가는 아니었고, 결국 제가 내놓은 대답은 "저도 잘 모르겠네요..하하" 였습니다. 골문 앞에 놓인 찬스를 제 발로 뻥 차버린 기분이었어요.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지만, 그래서 어떤 일을 하냐는 질문에는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껏 다재다능이라는 키워드를 방패막처럼 써온게 들통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러가지를 잘 하는 사람을 '다능인'이라고 부르고 있죠. 그래서 저도 스스로를 일종의 다능인이라 정의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일을 함에 있어서 다능인이라는 정체성은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소개하기엔 부족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누군가에게 일을 받거나, 나의 일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주특기'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가진 많은 재주 중에서 내가 가장 잘하는 '주특기' 말입니다.
제가 정의한 주특기는 이러합니다. 내가 가장 잘하고 일이라고 생각하며, 꾸준히 지속해오고 있으며, 이것에서 만큼은 누구한테도 지고 싶지 않은! 그것이 바로 제 주특기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어요. 주특기를 찾기로 결심하고, 커다란 페이퍼 보드를 벽에 붙였습니다. 그리고 포스트잇에 제가 가진 재주들을 하나씩 써내려 갔어요. 페이퍼 보드엔 각각 다른 문장을 적은 마스킹 테이프를 곳곳에 붙였습니다. 내가 진짜 좋아하고, 지속하고,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 잘하고, 잘 써먹고 있는 / 잘하지만 지속하지 않는 / 할 줄 아는 / 잘하긴 하는데 별 감흥이 없는 / 앞으로 배우고 싶은. 총 6개 항목으로 나누고 재주를 적어 뒀던 포스트잇을 제가 생각했을 때 적합한 항목 아래에 붙였습니다. 페이퍼 보드에 포스트잇을 전부 붙이고 나자, 제가 찾던 주특기가 윤곽을 드러냈습니다. 저의 주특기는 '아이디어 개발하기' 였습니다.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림 그리는 재주는 [잘하지만 지속하지 않는] 항목에 붙어 있었고, 책을 꾸준히 만들어 오니까 책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은걸까? 라고 생각했었는데 책 만드는 재주는 [잘하고, 잘 써먹고 있는]에 붙어 있었습니다. 글을 잘 쓴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글쓰는 재주는 [잘하긴 하는데 별 감흥이 없는]에 붙어 있더군요. [내가 진짜 좋아하고, 지속하고,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항목에 붙은 포스트잇은 단 두개 였습니다. 아이디어 기획과 일상에서 재밌는 거 발견하기. 일상에서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기획하는 일이 저의 주특기였던 모양입니다.
제 주특기가 '아이디어 개발'이라는 걸 깨닫고 다시 한번 더 페이퍼 보드를 살펴 보니까, 왜 제가 꾸준히 책을 만들어 왔는지 알겠더라고요. 저는 책의 물성을 좋아했던 것 같았습니다. 종이로 만들어 진, 글과 사진, 그림으로 채울 수 있는 여백, 머릿속의 아이디어를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결과물로 만들 수 있는 책의 특성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책을 꾸준히 만들어 오면서도, 책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에 대해선 명쾌한 질문을 내릴 수 없던 이유는 책은 그저 제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어 주는 도구였기 때문이죠. 그림을 배우고 싶어 하거나, 제본 방법을 배우고 싶어한 이유도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 때 필요한 일종의 도구였고요.
주특기를 찾고 나서 인스타그램의 소개글을 바꿨습니다. "아이디어 개발자" 라는 명칭을 쓰기로 했습니다. 물론 이 키워드만 보고서는 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까진 알 수 없기 때문에, 지금껏 계속 써왔던 '작지만 귀여운 재미를 찾아 주로 책으로 엮는 일을 합니다.' 문장을 덧붙여 줘야 하지만요. 그래도 전보다는 명쾌해진 기분입니다. "말코님은 외주도 받으시나요? 주로 어떤 일을 하세요?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전과 똑같은 질문을 받으면 할 수 있는 대답이 생긴 것 같거든요. '아이디어를 개발합니다. 책을 중심으로 여러가지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어요'. 정도면 지금의 저를 표현하기엔 충분한 답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